♣가톨릭♣/靈의 사람

[스크랩] 내적 경험 : 관상에 대한 해설 - 토머스 머튼

소눈망울 2016. 12. 29. 19:23

내적 경험    

- 관상에 대한 해설 -


- 토머스 머튼  서 한규 옮김







“관상을 삶의 한 부분으로만 여긴 내가 얼마나 큰 오해를 했는지, 관상가에게 관상은 삶의 전부이다.“

                                        -토머스 머튼




토머스 머튼의 마지막 작품인 이 책은 수도 생활과 종교 생활의 정수인 관상의 의미와 그 일상적 실천을 탐구한다. 이 책은 머튼의 가장 관상적인 작품이다. 이제 머튼 레가시 트러스트(Merton Legacy Trust)는 머튼이 귀천하기 직전에 완성한 이 훌륭한 원고를 출판하기로 하였다. “내적 경험”은 머튼 저작 목록에 추가될 주요한 작품이다.


머튼 학자인 윌리엄 H 쉐넌이 꼼꼼히 편집한 ‘내적 경험’은 관상에 대한 가톨릭 작품들에 정통한 그의 초기 저작들과 광범위한 분야를 다룬 그의 후기 저작들의 가교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의 말년의 사상과 저작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동방, 즉 불교의 묵상과 영성 전통에 관한 그의 관심도 보여준다.


‘내적 경험‘은 관상과 묵상에 관한 최고의 가르침에 대한 매우 훌륭한 설명일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관상을 실천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편집 및 서문 / 윌리엄 H 쉐넌



1. 사전경고

2. 내적 자아의 깨움

3. 사회와 내적 자아

4. 그리스도교 관상

5. 광상의 종류

6. 주부적 관상

7. 관상 기도에 대한 5가지 텍스트

8. 광명주의적 길의 역설

9.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

10. 위험들

11. 관상과 노이로제

12. 관상의 바램들

13. 죄의식

14. 관상생활의 문제점들

15. 전망과 결론



서문


관상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토머스 머튼으로 하여금 일생동안 고심케 한 화두였다. 또한 그의 초기 저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인디애나주 노틀담의 성 마리아 대학(St. Mary's College, Notre Dame, Indiana)의 학생들을 위해서 쓴 ‘관상이란 무엇인가?(What is Contemplation?)’는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인 ‘칠층산(1948)’의 출판으로 명성과 부를 얻은 바로 그 해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상이란 무엇인가?‘는 관상생활에 관한 머튼의 저작 목록에서 저평가되곤 한다. 그 책에는 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사실상 그 책의 모든 내용은 20세기 전반기에 나온 관상에 관한 다른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관상이란 무엇인가?’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더 나은 작품 ’관상의 씨앗(Seeds of Contemplation)‘에게 (비록 ‘관상의 씨앗’이 결코 관상에 관한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머튼은 관상을 주제로 한 그의 첫 작품을 결코 잊지 않았다. 초판이 발행된 지 11년 후인 1959년 여름 머튼은 개정판을 내기로 결심했다. 그해 여름의 끝 무렵에 원작의 틀을 대부분 유지하긴 했지만 훨씬 많은 내용이 덧붙여진 매우 다른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작품이 완성작이라고 설명했지만 보완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불러 일으켰다. 그 책이 “완성작”이지만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머튼이 마음속에 생각했던 그 ‘보완’은 커다란 것이었을까, 사소한 것이었을까? 실제로 그가 이 보완 작업을 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언제 그 일을 했을까?


머튼 저작에서의 증거


머튼은 1959년 7월 12일의 일기에서 언급하기를 “이번 주 동안 나는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썼다. 그 분량은 원작의 3배나 되었고 완전히 다른 책이 되었다.” 그 초기 작품을 썼던 1948년 이래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그는 말한다. 그 작품에서 관상에 관한 그의 생각은 지나치게 평이했다. “관상을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여긴 내가 얼마나 큰 오해를 했던가. 관상가에게는 관상은 삶의 전부이다.”1) 8일 전에 머튼은 렌트포어의 데레사 수녀(Sister Therese Lentfoehr)에게 이 계획에 대해 언급했었다. “바로 지금 내가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쓰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짜투리 시간을 내서 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그 일을 원했습니다. 또한 다른 초기 작품들도 손을 볼 것입니다. 그 작품들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고 실상 대다수는 창피할 지경입니다.” 머튼은 데레사 수녀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초기 작품들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지성에만 의지했으며 “관상에 대한 일종의 환상”에 골몰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내가 잘난체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고 약간은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된 듯 합니다.”2)

1959년 7월 21일에 기록된 일기에 따르면 머튼은 이 작업에 전념해왔다고 한다. 그는 하고 있던 작업에서 잘못 이해한 것-“‘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쓰는 것은 ‘공장’과 같은 ‘커다란 수도원’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이다.”3)-을 이미 설명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여름 내내 이 개정 작업에 매달렸다. 그래서 1959년 여름이 끝날 무렵인 9월 6일, 그는 “내 생각에도 이제 좀 번듯한 작품인 ‘내적 경험’에 대해 다시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4)

이 시점에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이 ‘개정작업’은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훨씬 능가하는 작품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 초기 작품(관상이란 무엇인가?)의 개정으로부터 나온 새로운 작품(내적 경험)에 대한 개정이었다. 그는 이제 ‘내적 경험’을 개정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부터 6일후, 1959년 9월 12일에 체슬로 밀로쓰(Czeslaw Milosz)에게 보낸 편지에서 머튼은 이 ‘번듯한 작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 막 또 다른 책 ‘내적 경험’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밀로쓰에게 책의 간략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동양적 사고와 더 관련이 있는 관상이라는 문제에 대한 더 넓고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줍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 밖에 없지만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5)

이 새로 완성된 책에 대해 또 다른 언급을 한 구절이 있다. 1959년 9월 29일 머튼은 데레사 수녀에게 “나는 ‘관상이란 무엇인가?‘의 단순한 개정판으로 시작했지만 ’내적 경험‘이란 제목의 새롭고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은 책을 이번 여름동안 끝마쳤습니다,”라고 말했다. 비록 그 책을 끝마쳤다고는 했지만 머튼은 수정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그 책은 개정되어야 하고 언젠가 손을 볼 수 있도록 내 책상위에 두고 있는데, 드릴과 기계들의 소음이 가득해서 도무지 생각을 할 수 없는 이 집에서는 작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련자들이 이 비좁은 수방(修房)에 샤워 룸 두개를 만들기 위해 내는 소음도 한몫하고 있습니다.”6) 마침내 새로운 샤워 룸이 만들어지고 드릴과 기계 소리가 멈추게 되었지만 머튼의 일기와 편지들 어디에도 그 개정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언급은 없다.

머튼의 일기 제3권 ‘고독의 추구(A Search for Solitude)‘, 1959년 9월 29일자를 보면 그는 데레사 수녀에게 그 책의 개정을 하려고 한다는 편지를 썼다. “나의 지난 원고들이 (내적 경험) 그대로 책상 위에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다시 손보려 합니다.”7)

더 고독한 장소(은수처)로 거주를 옮겨도 된다는 로마로부터의 호의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던 1959년 11월 19일에 머튼은 분명히 은수처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저작활동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명확히 인식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도 “교정과 수정”이 필요한 작품이 세 개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A) 에세이 -와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 (B) 존재론적 성사와 (C) 내적 경험(?) 이다.8) (A)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분명치 않다. (B)는 1961년 ‘새로운 인간(The New Man)’으로 출판되었다. "내적 경험” 뒤의 의문부호가 붙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혹시 머튼이 그 책의 개정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일기 제 5권 ‘생명의 바다에서의 춤(Dancing in the Water of Life)’, 1963년 8월 26일자를 보면 머튼이 그 시기에 그 책의 개정을 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미완성 작품들을 몇 에세이들과 함께 보완 작업하려고 했다. ‘내적 경험’9)의 개정도 하려고 했다,”고 언급한다. 그가 이 개정 작업을 “하려고”했다고 말하지만 더 이상은 그의 일기나 편지에서 ’내적 경험’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었고 또한 실제로 그가 개정 작업을 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그 개정작업에 관한 것은 머튼 레가시 트러스트(Merton Legacy Trust) 협정이 작성된 1967년 11월 14일까지는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협정 문서를 보면, 비록 그가 트러스트에게 “미출판 원고를 책으로 출판할” 권한을 주었음에도 “내적 경험”과 “성령의 학교”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었다는 점에서 머튼은 내적 경험의 개정작업을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원고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두 원고는 결국 책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그러나 트러스트는 “적격의 학자들이 위의 두 작품들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허가”했다. 머튼의 유서 초안은 그의 유서를 작성하도록 의뢰받은 존 슬레이트(John Slate)10)에게 보내졌는데 머튼은 “[이 두 원고]의 초고가 출판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언급하고 있다.11)

“내적 경험”의 출판에 대한 이러한 제제조치는 트러스트의 협정문서가 작성되었던 1967년까지 머튼이 만족스러운 개정작업을 완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가 작업을 완료했더라도 그 개정 원고에 대해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증거들은 “내적 경험”의 현존하는 네 가지 초고들이 1959년에 쓰여졌다는 나의 확신을 뒷받침해준다. 원고 4에 짧은 (그리고 거의 중요하지 않은)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진 1968년까지는 원고에 대한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참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1968년 개정 원고이다.


머튼 저작 밖에서의 증거들


(1) 머튼이 원고의 개정을 하고 있었다는 암시를 주거나 (2) 그가 그 작업을 하였다고 말하거나 (3) 개정이 완료되어 그가 원고의 출판 가능성에 대해 호의적이었다고 암시하는 증거들을 머튼의 저작들 밖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 콜럼비아 대학에서 머튼에게 철학을 가르쳤고 후일 루이빌에 와서 루이빌 교구에서 수품을 받았던 대니얼 월쉬(Daniel Walsh)가 이 세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공해 준다고 확신한다. 월쉬가 1972년 5월 6일자 플래비언 번즈(Flavian Burns) 신부에게 쓴 편지를 보자. 그는 머튼이 1968년 아시아로 떠나기 직전에 벨라마인 대학(Bellarmine College)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잠깐 들른 적이 있다고 게쎄마니 수도원의 아빠스에게 말하고 있다. 월쉬는 그 때 길(뉴버그 길-NewBurg Road) 건너 갈멜 수녀원에 가서 관상에 대해 짧은 강의를 할 예정이었다. 머튼은 서둘러서 방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머튼은 그의 수품 기념일 선물을 주려고 왔다고 했다. 이 방문일은 1968년 5월 14일 경일 것이다. 월쉬는 1967년 5월 14일에 수품 받았기 때문이다. 머튼은 그에게 말했다. “[이것]은 내가 오래 전에 썼던 것이지만 출판되었을 때 그 반응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저는 이미 [머튼 레가시 트러스트에서] 출판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제가 다시 읽어 보니 선생님께서 이 원고에 수정과 보완을 좀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갈멜 수녀들에게 그것을 읽어주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달라고 월쉬에게 부탁했다. “제가 돌아오고 나서 그것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지요.”

월쉬는 그 원고를 갈멜 수녀들에게 보냈다. 수녀들은 1년 동안 강독 시간에 그것을 읽었다. 월쉬는 “수녀님들이 그 원고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고 플래비언 아빠스에게 썼다.

머튼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계속하기로 했던 논의는 1968년 12월 10일 머튼의 사망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머튼의 소리는 태국 방콕에서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그 매우 비통한 불의의 죽음으로 영원히 묻혀버렸다.

그 동안 월쉬는 다른 시급한 문제로 갈멜 수녀원에서의 강의를 중단했다. 머튼의 끔찍한 죽음이 알려졌을 때, 월쉬는 머튼이 마닐라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사무실에 왔을 때, 갈멜 수녀원으로부터 배달된 봉투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우편물이 플래비언 신부에게 “‘내적 경험’의 원본으로 톰이 손을 본 수정판이었습니다.”고 말한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월쉬는 여러 번 그 원고를 읽었고 “나는 그것이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이며 출판이 된다면 아주 훌륭한 책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12) 라는 평가를 덧붙여 플래비언 신부에게 보냈다.

대니얼 월쉬가 플래비언 신부에게 쓴 이 편지는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머튼은 “내가 오래 전에 쓴 것”에 대해 말했다. 그 “오래 전”은 1959년 여름일 것이다. 그는 1959년에 썼던 이 작품의 수정작업을 했다. 언제 했을까? 그는 월쉬에게 최근에 “수정과 보완”을 했다고 말했다. 그가 월쉬를 방문한 시기는 아시아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이것은 그 최근의 “수정과 보완”이 1968년도 (그러므로 트러스트 협정에 사인을 한 이후)에 이루어졌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일단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지자 그는 “내적 경험”을 출판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월쉬는 플래비언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정본의 보완 작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트러스트의 계약이후 그 작품의 출판에 대한 톰의 마음이 변했다는 내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플래비언 신부는 월쉬의 의견에 동의하며 이 작품이 출판되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머튼 트러스트의 변호사인 존 포드(John Ford)는 구두 증거(월쉬의 증언)는 유언장을 파기시킬 수 없다는 법적 판결문을 보냈다. 이것으로 그 문제는 종결되는 듯 했다. ‘내적 경험’은 출판될 수 없었다.

1981년도에 나는 “내적 경험”의 내용을 요약하고 약 20%정도의 선택된 원고로 이루어진 ‘토머스 머튼의 어두운 길’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것은 책으로 출간될 수 없었지만 적격의 학자들이 인용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트러스트에 의해 출판 허가를 받았다.

1983년도에 시터시언 스터디 계간지(Cistercian Studies Quarterly)는 ‘내적 경험’의 대부분의 내용을 시리즈로 출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이것은 1983년과 1984년에 걸쳐 8회로 나뉘어 실렸다. 당시에는 그 책들을 모두 낱권으로 구입해야 했다. 이것들을 더 쉽게 구입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편집자는 8회분의 원고를 각각 4회분씩 두 권의 책으로 묶었다. 시터시안 스터디는 깨닫지 못했지만 낱권의 원고를 책으로 엮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내적 경험’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트러스트 관계자 중 한명은 국회 도서관의 요청이 오자 ‘내적 경험’이 출판된 책으로써 명부에 올랐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2년도에 로렌스 S. 커닝햄(Lawrence S. Cunningham)이 ‘토머스 머튼, 영적 스승; 핵심 작품들’이라는 그의 머튼 연구서에 이 책의 첫 두 장(掌)을 포함시켰다.

‘내적 경험’의 부분 부분들에 대한 자료가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서 머튼 트러스트는 머튼과 이 원고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내적 경험’을 책으로 출판할 시기가 되었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1) 그 원고에 대한 신중한 편집, (2)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 (3) 머튼의 전작에서 적절한 역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하기, (4) 전작에서 그 중요성에 대한 평가 등을 제공하게 될 출판을 의미했다. 이 목적들은 ‘내적 경험’을 이와 같이 책으로 출판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편집


‘내적 경험’의 편집은 특별한 문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 타이프 원고는 벨라마인 대학의 토머스 머튼 센터의 소장품들과 함께 네 개의 원고로 존재했는데 불행히도 그 모든 원고들은 원본이 아니었고 사본이었다. 더욱이 그것들은 날짜도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머튼이 대니얼 월쉬에게 1968년에 준 원본의 위치를 알고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것은 머튼이 월쉬에게 ‘최근에’(즉, 그가 아시아로 떠나기 전에) 수정하고 보완한 수기(手記) 형태의 것이었다. 이 수정과 보완부분은 모두 약 450단어 정도 되었다. 그 중 125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단락은 더 이른 시기에 원고에 삽입되었다. 나머지 보완과 수정들은 문장이나 어구나 한 두 단어들이었다. 그 대부분은 원고에 새로이 첨부된 설명이었다. 원고의 한 쪽은 약 430단어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든 수정과 보완은 다 합쳐서 151페이지의 타이프 원고의 한 두 페이지 보다 조금 많을 뿐이었다.

비록 머튼이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았음에도 이 원고는 머튼이 원했던 최종 수정 본이었기 때문에 나는 원고 4라고 불렀다. 원고 3(벨라마인 대학의 사본에서 그렇게 명명된)은 수정과 보완 부분이 빠진 것과 사소한 페이지 숫자의 다른 점을 제외하면 원고 4와 일치하였다.


본문 날짜 기입


‘내적 경험’의 날짜 기입에 대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위에 언급된 증거들로부터 1959년 여름 동안 네 원고가 쓰여졌음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원고들은 1959년 9월경에 완성되었다. 그는 그 작품에 대해 손질하기를 원했음에도 1968년 그가 아시아로 떠나기 직전까지 그러한 개정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시기의 “보완과 수정”은 상당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내적 경험은 전반적으로 1959년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원고 1”이라고 불리는 원고는 데레사 수녀와 밀로쓰에게 설명한 ‘완성작’으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수기와 타이프 글자와 행간여백 없이 타이프된 것들로 가득했다. 그것을 조리 있게 읽는 방법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원고 4에는 다른 세 원고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 모두 있으며 1968년의 “수정과 보완” 내용 또한 있다. 책을 완성했다고(데레사 수녀와 밀로쓰에게) 편지를 썼을 때 머튼은 (수정과 보완을 하지 않은) 원고 4에 대해서 말하고 있거나 기본적으로 원고 4와 같은 내용인 원고 3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그가 개정 작업을 해야겠다고 지속적으로 말한 그 원고이지만 그가 1968년까지 개정 작업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왜 1968년일까? 그것은 그가 오래 전에 썼던 책의 “수정과 보완”을 ‘최근에’ 했다고 월시에게 말했던 것이 그해 여름 어느 날이기 때문이다.

이 출판된 작품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1968년에 수정과 보완이 된 1959년의 이 원고이다.


머튼 전작에서 “내적 경험”이 가지는 중요성


내적 경험은 머튼의 모든 작품들과 관상에 대한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요성은 (비교적 수정과 보완이 적었던 1968년의 원고를 제외하면) 1959년의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머튼의 초기와 후기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관상이란 삶의 어떤 동떨어진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하나의 완전함으로 융화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관상의 씨앗(Seeds of Contemplation)’13)에서 그가 짧게 언급했던 거짓 자아(False Self)와 참 자아(True Self)의 차이는 더 풍부히 설명되었다. '고독의 철학에 대한 소고(Notes for a Philosophy of Solitude-1960)'14)의 마지막 부분과 ‘새 관상의 씨앗(New Seeds of Contemplation-1962)’에서 서정적으로 표현했던 그 차이에 대한 인상적인 설명의 전조가 되었다. 나아가 우리는 처음에 머튼이 ‘관상의 씨앗’에서 동방 종교에 대해 간단히 처리한 것과는 현저히 대조적으로 여기에서 동방의 종교적 사상들15)과 점진적으로 관련을 맺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동방과의 접촉에 수반하여 그는 (그 진가가 충분히 인정된 다양한 존재론적 작가들과 관련이 있는) 존재론적 사상에 매혹 당했다. 우리는 또한 그의 초기 작품들을 훼손시키는 이원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변화도 발견한다. 더 초기 작품들에서 보이는 과도한 “세계 부정적 입장”으로부터의 확실히 벗어나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세상에 돌아온” 명확한 징후도 보인다. 평신도의 소명이 취해야하는 방향에 대한 그의 제안이 어느 정도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 내에서 평신도의 소명이 가지는 역할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위에 언급된 1959년 9월 12일자 체슬로 밀로쓰에게 보낸 머튼의 편지는 “내적 경험”에 대한 유용한 내용을 담고 있다. : “나는 동양적 사고와 더 관련이 있는 관상이라는 문제에 대한 더 넓고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줄 다른 책, ‘내적 경험’을 끝마쳐 갑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 밖에 없지만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점에 유의하자. (1) ‘내적 경험’은 관상에 관한 책이다. (2) 머튼은 그 주제에 관해 더 관상적 시각을 (더 넓고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려고 했다. (3)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교적 관상이 동양적 종교 사상과 연관이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4) 관상은 사람의 삶 전체와 관련이 있으며 그 삶을 하나의 완전함에 융화시킨다.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융화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점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 나감에 있어 훌륭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본문 비평가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들 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미완성작”이라고 말해졌다. 마이클 캐세이(Michael Casey)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정리”된 것으로 보았다. 각 장의 번호 (번호가 누락 된 것도 있었다.)는 비록 결국에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각장이 각기 독립되어 읽혀질 수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머튼의 책, 예를 들면 ‘새 관상의 씨앗’에는 적용되지 않는가?) 그렇지만 이 각각의 장들 사이에는 조화도-머튼이 그 책에 대해 언급한 밀로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는 조화- 발견할 수 있다.

머튼이 이 작품에 붙인 부제 “관상에 대한 소고들(Notes on contemplation)”도 눈여겨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고”는 관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논의에서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하는 요소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점에서 “관상에 관한 소고”는 그 11년 후에 “논쟁점(Disputed Questions -1960)”의 한 장(章)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독의 철학에 관한 소고”와도 다르지 않다. 그 에세이가 고독의 철학에 관해 완전한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듯이 ‘내적 경험’을 관상에 관한 포괄적인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머튼은 이 책으로 관상에 관한 완전하고 완성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감사


원고의 초벌 타이핑을 해준 다이앤 애단테에게 감사드리며 격려와 훌륭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패트릭 하트 수사(Brother Patrick Hart-토머스 머튼 신부의 비서역임, 현 게쎄마니 수도원 아빠스 비서)와 크리스틴 보천 박사에게도 감사드린다. 특히 ‘내적 경험’을 출판하도록 이 행복한 작업을 나에게 맡겨준 머튼 레가시 트러스트 관계자, 앤 맥코믹(Anne McCormick), 로버트 기로(Robert Giroux)와 토머사인 오칼러핸(Thomasine O'Callaghan)에게도 나의 감사를 표한다.


-윌리엄 H. 쉐넌 (William H. Shannon)

[제 1 장]

사전 경고


모든 면에서 파멸의 위협을 당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동시에 행복에 대한 신기루와 같은 환상에 둘러 쌓여있습니다. 그런 위협과 환상은 종종 똑같은 정치적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모두 바로 이 지상에서 가능합니다. 우리 각자가 가질 수 있는 감정적 천국과 지옥은 점점 더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나누어 가져야만 하는 것이 서로의 천국이기보다는 지옥이 되는 것도 명백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천국”이라고 영혼 속에 비밀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욕망을 어떤 문제에 대한 일반적 해결책이라고 제시할 때 종종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되곤 합니다. 이것이 20세기 문명의 기이하고 불쾌한 모습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감정적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명망 있는 심리학자와 종교지도자들과 감상적 낙관주의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전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닙니다. 좋던 나쁘던 내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그들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답게 우리에게 현재에 모든 것을 초점 맞추라고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고무되고 앙양(昻揚)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현대적 삶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우리의 비참한 상황을 못 견뎌합니다. 그들은 현대적 삶에도 밝은 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가장 주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삶의 질이 향상되고 운이 점점 더 좋아져서 곧 우리는 더 즐기기 위해서 점점 덜 일하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정신적으로 자립하려고 하며 종교에는 적당히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면서 다행스럽게도 희생과 노고를 피하게 되는 그런 공허한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자발적 상담자들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천국에 계시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지상에 있기 때문에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자신감을 회복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 때에 관상생활이라는 사람의 영적 순례의 가장 메마른 길에서 평화와 기쁨과 행복이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대단히 부정직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일이 될  것입니다. 관상의 길은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간다하여도 종종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 나는 그 노력이 헛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이 책이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줄 목적이나 그의 어려움을 벗어날 쉬운 길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말합니다. 기껏해야 거의 도식화 시킬 수 없는 영적이고 관상적인 특색을 나타내는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조금 안심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관상 생활의 이상한 법칙 중의 하나는 여러분이 관상 생활 속에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들이 스스로 어느 정도 해결될 때까지 여러분은 그 문제를 견뎌야합니다. 혹은 삶이 그 문제를 해결할 때 까지 견뎌야합니다. 해결책은 그 문제들이 실체가 없는 여러분의 외적 자아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옵니다. 그런 문제들 대부분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은 이 거짓 자아가 소멸될 때 나옵니다. 그 결과 만약 여러분이 관상이나 나아가 행복을 찾으려는 의도로 관상 생활에 접근한다면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관상 생활의 또 다른 법칙입니다. 둘 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선적으로 포기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관상생활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관상에서 (어떤 것을 의미하던지) “성취”하려는 거짓 자아를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외적 자아의 활동 때문에 항상 숨어 지내게 된 관상적이고 영적인 자아, 동면하고 있는 신비스럽고 숨겨진 자아는 성취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그 존재 안에서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하느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관상가가 되는데” 여념이 없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상당히 해로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분이 어떤 의미에서 관상가가 되었다면 (여러분이 그 사실을 알거나 몰랐거나 별 차이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여러분에게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으면서 이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의 의도에 부합하던지 아니던지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단지 읽으십시오. 결과에 주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 결과를 보게 되기 전에 그 결과는 이미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낯선 방법을 통해서이지만 이제부터 좋은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서문의 목적은 단지 독자들을 비난하거나 의도적으로 낙담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이 책이 결코 “고무적인 것“으로 대우받기를 원치 않는 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즉 이 책은 독자들에게 펼쳐질 것이라고 이 책이 주장하는 어떤 영적 기회들에 대해서 독자들이 호감을 가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게을리 한 본분을 상기시켜주거나 그것을 더 잘 수행하는 방법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으며 다른 근시안적 “영성 작가들”에 의해 왜곡되어 왔던 참된 관점을 복구하려는 새롭고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소위 관상가라는 소수 엘리트집단에 속하게 됨으로써 일종의 뛰어난 존재가 될 것이라는 그럴싸한 약속도 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어떤 새로운 독실한 신앙의 방법을 처방해 주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모든 현실에 대해서 형식적이고 독선적으로 물러나라고 장려하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수동성과 관성에 대해 오로지 찬성으로 일관하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어떤 특별한 심리적 요법을 (비록 그것이 영성 생활에서 분명히 적절한 가치가 있다고 하여도) 처방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부분으로 나눠진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한 부분을 닫아걸고 그것이 다른 모든 것들 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과는 구별된 그것을 특별히 잘 돌보아야 한다고 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상이 서양인들의 혼란과 산만함에 대해 경고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다가올 때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동양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더 관상적인 기질을 타고나는 좋은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관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기도 전에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여러분의 근본적인 본성적 조화를 회복하고 여러분의 분열된 부분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재통합하여 단일화된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흐트러진 존재의 조각들을 다시 하나로 모아서 여러분이 “나”라고 말할 때 여러분이 말했던 그 대명사를 뒷받침해 주는 실제의 누군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의견, 취향, 행동, 욕망, 소망과 두려움에 대한 표현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마음 내키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나는 생각한다.”고 말할 때 종종 그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분이 아니고 여러분을 통해 말하고 있는 집단 속에 숨어있는 “그들”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원한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종종 강요된 것을 받아들이고 값을 치루는 자동적인 동작을 할 뿐입니다. 즉,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도록 강요된 것만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 “나”는 누구입니까? 엄격하지 않고 실용적인 심리학자들은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대명사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현재의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진실에 대한 단초가 있을 것입니다.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명사 보다는 여러분 한 명에 붙여지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설명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여러분은 자신을 객관적 대상이나 다수 안의 이름 없는 한사람이 아니라 독립된 주체로 명확히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자신을 그 고유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놀라움을 자아내는 성과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시인들이 비웃을 수도 있는 첫 걸음일 뿐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는 것이 진정한 사람을 나타내는 그 이름을 알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업이나 정치, 학문, 종교세계에서 매우 적극적인 자기구현에 전념하는 가공의 인물에 대한 이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서서 그 분을 “당신”으로 알게 되는 “나”는 아닙니다. 거기에서의 “나”는 결코 순수한 “당신”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조차도 그런 “나”의 연장이고 그 반사체이고 그 변형이며 그 일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나”는 다른 존재들과 명확히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말할 때 그 “나”가 매우 의식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표현이라고 하여도 자신이 객관적 대상의 세계에 몰두하여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관상”에 대한 말을 듣는다면 그 ‘나’는 “관상가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즉, 그 ‘나’는 본질적으로 관상이라고 불리는 것에 탄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기 위하여 ‘나’는 자신과 사이가 벌어진 자아를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거울 앞에 선 어린 아이와 같이 관상적인 모습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적합하고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관상적인 모습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요란한 자아도취가 내부로 방향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사랑 안에서 자신을 먹이로 삼게 되는 사실을 보고 그 자신이 경험한 것이 하느님을 경험한 것이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나”, 의도되고 일시적인 존재로써의 “나”, 객관적 대상을 손에 넣기 위해서 객관적 대상을 교묘히 다루려는 “나”는 어떤 의도도 없고 어떤 것도, 심지어 관상조차도 성취하려고 하지 않는 숨겨진 내적인 “나”와는 다른 것입니다. 내적인 ‘나’는 그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무엇을 의도하고 이루려고 하는 대신에 ‘존재하시는 분’의 비밀스러운 법과 최고의 자유(즉, 하느님)가 격려하는 바에 따라 무엇이 되고 (내적인 ‘나’는 역동적이기 때문에) 움직이려고 할 뿐입니다.

만약 마치 마음속의 어떤 것을 교묘히 다루어서 어느 정도 내적 자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인 관상적 비밀을 차지할 수 있다는 듯이 외적 자아가 마음속의 어떤 것을 움켜쥐고 교묘하게 다루려한다면 그것은 실로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내적 자아는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악마에 의해서도 조종되거나 속아 넘어갈 수 없는 바로 그 자아입니다. 내적 자아는 다른 존재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것이 완전히 평온하고 고요하고 불안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매우 조심성 있는 야생동물과도 같습니다. 내적 자아는 어떤 것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유혹받을 수 없습니다. 내적 자아는 하느님의 자유로부터 온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유혹에도 응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관상가라고 생각하고 관상을 의도적인 노력과 영적 야심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관상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외적 자아는 비극적인 것입니다. 외적 자아는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것이고 그 자신의 마음가짐에 대한 내적인 의미를 생각할 것이고 자신을 관상가와 동일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한 그곳에는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자신을 찾고 무로부터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강박관념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개인적 환상의 노예가 되어 실체가 없는 꾸며낸 “나”만 있을 뿐입니다.


관상으로의 초대는 그런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며 다가 올 수도 없습니다.






[제 2 장]


내적 자아의 자각


말한바와 같이 내적 자아는 무엇보다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아무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 내적 자아를 발견하고 자각하는 어떤 특별한 기술은 있지도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내적 자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그것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마치 그 본질이 내적 자아의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그래서 내적 자아를 능가하는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공해 줄) 어떤 적절하고 오류가 없는 수단을 이끌어 내려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존재론적 본질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내적 자아는 자동차에 붙어 있는 내연기관처럼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내적 자아는 그 자체로 가장 높고 개인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우리의 완전한 본질적 실체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것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우리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다른 모든 것을 살아 움직이게 해 주는 생명입니다. 내적 자아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 안에 함께 있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내적 자아가 깨어난다면 그것은 지성에게 새로운 생명을 전달해 주어서 저절로 살아 있는 깨달음이 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새롭고 형용하기 어려운 특성입니다.

내적 자아는 하느님만큼 비밀스럽기 때문에 그 분과 같이, 그것을 붙잡아 소유하려는 모든 생각들을 헛되게 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 대상으로써 소유하거나 연구될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묵상을 포함한 이 세상의 어떤 작용에 의해서 다다르거나 구슬려 꾀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 훈련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내적 자아가 존재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예측할 수 없게 드러낼 때 요구되는 고요함, 겸손, 초연함, 순수한 마음과 무관심 등을 마음속에 만드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종교적이든 도덕적이든 예술적이든 모든 깊은 영적 경험에는 내적 자아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내적 자아에서 나오는 모든 영적 경험만이 깊고 실재적이며 간접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해줍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깊이의 영적 경험은 내적 자아를 모방한 느낌만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 본성 안에서 잊혀진 내면의 상태와 그것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우리의 무력함을 일깨워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별한 문화의 영적인 환경은 내적 자아의 비밀스럽고 내재적인 발달을 뒷받침해줍니다. 종교적이고 지혜로운 본성을 가진 동 서양의 고대 문화 전통은 내적 생활을 장려하며 유아기에서 성숙함으로 가는 내적 자아에게 자양분을 주는 전형적인 상징, 즉 제례 음악, 그림, 시, 철학과 신화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요소들을 전달해 줍니다. 그런 문화적 배경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내적 생활에 대해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며 주관은 병적이거나 과도함으로 벗어날 위험을 무릅쓰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그런 문화적 배경은 더 이상 서양에 존재하지 않으며 평범한 특성도 아닙니다. 그것은 교육받아 문명화된 소수의 사람들이 고심하며 되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선(禪)으로부터의 예


이 책이 주로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를 다룬다고 하여도, 우리는 동양적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내적 인식의 사례들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자기실현의 신비스럽고 인상적인 예이며 그 경험의 기본 원리들이 아주 분명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의 “객관적으로 완벽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영적 개화이며 가장 깊은 자아를 드러내는 은밀한 영혼의 만발함인 사토리(satori-선불교에서의 영적 자각)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것은 보통 우리가 관상이라고 부르는 그 평온함 안에서 일어나지만 단지 내적 평화만으로는 가장 심오한 자유와 접촉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조용한 관상적 몰두의 차원을 넘어 갑자기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것이 초자연적이거나 신비적인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선은 어떤 의미에서는 비신비주의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내적 자아의 본성적 작용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실상 오늘날 선의 대표적 수장인 D.T. 스즈키는 그 “본성적” 특징을 “완전히 심리적” 현상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영적인 것을 그리스도교의 신비적 경험과 대비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것을 신비적 은총의 영향 없이 내적 자아의 작용을 보여주는 심리적 문제로 검토한다면 어느 누구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은총 없이 완전히 본성적 수준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든 아니든, 스즈키의 의견을 반대하여 그것을 신비적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있건 없건 그것은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나는 편의상 스즈키의 말을 듣고 완전히 본성적이고 경험적 사실들이라고 그가 직접 설명한 예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선의 본질이며 정수인 사토리는 오랜 정화와 노력 그리고 아주 단호한 영적 훈련 후에 수도승이 자신의 거짓 외적 자아를 산산이 부숴버리고 “그의 본래의 모습”, 그의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의 본래의 자아” [혹은 더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부처적 본성”. 여러분이 이 실재적 자아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힌두 철학의 푸루샤(purusha-정신적 원리)인 타사가사(tathagatha)라고 부르든, 선의 “본질”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살펴보고 있는 바로 그 내적 “나”입니다.]만을 남겨두는 일종의 내적 폭발을 체험하게 되는 커다란 전환을 가져오는 영적 경험입니다.

어느 선승의 속가(俗家) 제자였던 송나라의 관리의 경험을 보겠습니다. 관리였던 차오 피옌은 그의 사무실에서 우리가 단순한 관상 기도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로 그의 정신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선 이론에 따르면 그는 그의 내적 자아의 은밀한 압력이 사토리 안에 있는 그의 전 존재를 돌발적으로 튀어나오게 하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할 준비가 된 내적 성숙함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어떤 우연한 소리나 말이나 사건 등이 “깨달음“의 폭발을 유발시키기 쉽다고 선승들은 말합니다. 그 깨달음은 대부분 외적 자아의 무가치함에 대한 갑작스럽고 결정적이고 완전한 깨달음과 그 결과 진정한 자아, 즉 내적 ”나“의 해방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양의 말입니다. 선어(禪語)에서의 진정한 자아는 자아와 자아가 아닌 것의 구분을 뛰어 넘습니다. 차오 피옌은 천둥소리를 들었을 때 거기에 평화롭게 앉아 있었고 고요한 존재의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의 문이 쾅 하고 열려“ 그의 ”본래의 자아“ 혹은 ”본성“이 드러났습니다. 그 모든 일은 중국 문화에 따라 4행시로 축약되었고 불멸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사무실 책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물과 같이 맑은 내 마음의 샘은 방해받지 않고;

      돌연한 천둥소리에 마음의 문은 쾅 열리고,

      그리고 보라, 그지없이 수수한 노인이 앉아 있도다.1)


영적 경험의 한 예로써 이것은 그런 모든 것들이 정말로 초자연적이고 천상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분노케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바로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영적 경험을 비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반어법을 즐겨 사용하는 스즈키는 우리에게 친숙한 서양의 사랑에 대한 신비주의의 정서적 비약과는 대조되는 무미건조하고 비정서적인 경험에 대한 유머를 사용합니다.2) 불행히도 선정적이거나 정서적인 특징이 부족하다고 해서 이 경험들을 뚜렷이 “동양적”인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영성에서는 정서적이거나 경건한 경험(바크티-bhaketi-신애(信愛))과 지성적 형태의 경험(라자 요가-raja yoga-고대 인도 귀족들의 명상 수련)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독특한 중국적 정취를 가지고 있지만 ‘무지의 구름’이나 다른 서양의 비교감적 신비주의의 작품에 친숙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차오 피옌은 그의 거짓 자아가 갑작스럽고 즐거운 폭풍에 의한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오 피옌은 이전과 똑같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친숙하지 않은 이름을 가졌으면서 동시에 그가 긍정과 부정, 주체와 객체, 자아와 비자아를 넘어 서기 때문에 비천하면서 강하고 무서우면서 재미있고 어떤 묘사나 비유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멸의 차오 피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놀랍고 엄청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나와 주님은 하나입니다,”라고 그리스도교인이 깨닫는 겸허한 기쁨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두 존재를 하나로 융화되게 하는 것과 같은 이 일치를 어떡케든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항상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과 같지 않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즈키가 이런 경우에 “다른 존재”와의 일치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솔직한 이유입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본성적인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여하튼 그것은 중요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고 내가 설명하려고 해 왔던 것에 대한 엄청난 빛을 줄 것입니다.

우선 영적 깨달음을 얻기 전일지라도 차오 피옌은 고요한 명상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고”에서 벗어났습니다. 정신이 “순수”하지만 결코 비어있거나 수동적이거나 잠들지 않는 “무지의 구름”으로 그는 들어갔습니다. 이 공(空)의 상태는 또한 일종의 가득함이며 이 고요함은 죽어 있거나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고 그 가능성의 실현이 어떤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어떤 특별한 형태를 가질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도 예상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 실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침착하게 서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도 없고 정신적 노력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것을 받을 수 있고 아마도 실제로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마음의 원천”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 고요한 무지는 아직 참된 내적 자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자아가 그 은밀한 정체성을 포기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상황입니다.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고 내적 의식의 “문”이 확 열립니다. 그 천둥소리는 거짓 자아, 외적 자아가 있는 그대로의 무에 완전히 노출되어 신기루처럼 즉시 없어지게 되는 그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자기실현을 야기할 정도로 놀라운 것입니다. 완전한 허구이며 단지 관능적 애착과 자기기만의 환영인 거짓 자아는 사라질 뿐만 아니라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보여지기 까지 합니다. 대신 진정한 자아가 실제로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노인”이라는 말을 바오로적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 바오로의 말에서 살펴보면 그와는 반대로 “새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왜 “노인”일까요? 참 자아는 창조되지 않은 절대자 안에서 영원히 존재해 왔고 “창조되지 않았다”는 불교적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 자아는 신구(新舊)를 뛰어 넘기 때문에 항상 오래되고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아가 왜 “수수하다”고 묘사될까요? 영적 깨달음의 경우에는 내적 자아는 황금 갈기를 세우고 으르렁대는 사자와 같이 놀랍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것처럼 보입니다. 윌리엄 블래이크(William Blake)의 시구에서 그와 같은 경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오 피옌은 아마도 그 참 자아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하고 보잘 것 없고 겸손한 것을 알고 아주 편안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수수한” 노인으로도 행복합니다. 내적 자아는 이상적 자아, 특히 위대함, 영웅적 행위, 무오류에 대한 우리의 강박적 요구에 부합하도록 만들어 낸 비현실적으로 완전한 창조물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진짜 “나”는 단지 내 자신일 뿐이고 더 이상의 무엇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지금의 우리의 자아는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 자아이며, 우리의 유일성과 존엄성과 비천함 속에 있는 자아입니다. 그것은 그 분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기”(사도행전 17:28)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아이며 그분과 함께 나누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함속에 있는 자아입니다.

그 간결한 시는 그가 결코 그의 거짓 자아가 아니며 그가 처음부터 눈부심이나 자기 강화나 자기 정당화나 자기 염려도 없는 그의 진정하고 “수수한” 자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깨달은 사람이 경험하는 완전한 해방감을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접근


이런 내적 자아의 발견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는 친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명확히 설명한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선(禪)에서는 내적 자아를 넘어서는데 어떤 노력도 없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내적 자아란 단지 하느님을 알게 되는 디딤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그의 내적 자아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비추어지도록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까지 하시는 일종의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내적 존재의 흐릿하고 비추어 보이는 신비를 통해 우리는 소위 “희미하게나마”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전히 은유적인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본성과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대화한다는 표현 방법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가 참 자아를 발견하고, 그래서 내적 “나”를 넘어서 간다면, 전지전능하신 “나는 존재한다,”는 분을 대면하게 되는 한없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선 작가들은 오직 그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그 경험에 신학적인 해석과 추정을 추가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 신비주의의 두드러진 특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과 영혼의 본성, 전지전능하신 “나”와 우리 자신의 내적 “나”사이에는 무한한 형이상학적 골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우리의 내적 “나”는 하느님 안에 존재하고 하느님은 우리의 내적 ‘나’ 안에 거주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내적 존재의 경험과 하느님께서 우리의 내적 자아 안에서 내적 자아를 통해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신다는 인식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울과 그것에 비친 형상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 차이는 신학적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자아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자연스럽고 심리학적인 정화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내적 자아 안에 거주하심에 따라 당신 자신을 내부로 드러내신다는 견지에서 초자연적 관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신비적 경험은 내적 자아에 대한 인식일 뿐만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강화된 신앙에 의해 우리의 내적 자아 안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적 이해이기도 합니다. 이만 간단히 줄이고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옛 성인들의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영혼과 같은 종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는가? 우리의 정신은 하느님적인 것을 찾으려한다. 그것은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진리, 약해질 수 없는 실체를 찾으려 한다. 우리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다. 우리의 정신은 발전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며,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며, 기억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무상한 변화는 하느님에 어울리는 조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느님을 가시적이고 유형의 것에서 찾으려한다면 그 분을 찾을 수 없다. 내 안에서 그 분의 실체를 찾으려 한다면 그 분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나의 하느님을 내 영혼보다 숭고한 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분께 가기 위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내 위로 나의 영혼을 들어올려야 한다. 내 영혼이 들어올려지지 않는다면, 언제 내 영혼이 “내 영혼 위에 계신” 그분께 갈 수 있겠는가? 영혼이 내 안에서 쉰다면 나를 넘어선 다른 어떤 것도 볼 수 없을 것이고 영원히 하느님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내 위로 영혼을 들어 올렸고 더 이상 나의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도달하고자하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분께서 거주하시는 곳은 내 영혼 위에 있다. 그곳에서 그분께서 나를 바라보시고, 그곳에서 그분께서 나를 통치하시고 나를 기르신다. 그곳에서 그분께서 나에게 호소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명령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내 여정의 끝까지 나를 이끄신다. (시편 41 해설)

                                *        *         *

거기로부터 (즉, 플라톤 학파들) 내 자신으로 돌아오라는 타이름에 따라 나의 은밀한 내적 자아로 들어갔고 당신은 나의 길잡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들어오고 나서 나는 영혼의 눈으로 내 영혼의 눈과 정신이 미치지 못하는 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 약한 내 안광에 아찔하도록 세찬 빛을 쏘아주셨기에 난 사랑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최민순 역 고백록에는 제7권 제10장, 원문에는 고백록 제7권 16장으로 되어 있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성적이고 플라톤적 고찰은 우리가 바로 위의 ‘선으로부터의 예’에서 살펴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경험적 상태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하는 “은밀한 내적 자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동양 신비가들이 ‘자아’, 혹은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양 신비가들은 ‘하느님’이라고 말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과 하느님의 신비적 결합은 영적 경험에서 어떤 의미로는 “분리될 수 없다”(형이상학적 구분에도 불구하고)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양 신비가들이 형이상학적 구분이라는 미묘한 점에 대해 수세기동안 신학적인 논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은밀한 내적 본질’을 안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잠시 라인강 유역의 도미니코회 신비가인 요한 타울러(John Tauler)3)의 작품을 살펴봅시다. 그에게 내적 자아, 은밀한 내적 “나”는 영혼의 “근간”이거나 “중심”이거나 “정점”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따라 훈련된 타울러는 그 동양적 신비주의와의 유사함이 오늘날 널리 연구되고 있는 에크하르트4)를 제외하면 그의 스승들보다 더 구체적이고 덜 이론적입니다. 차오 피옌의 “마음의 샘”과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타울러의 글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자신을 돌아보고 참으로 하느님께서 거주하시고 활동하시는 성전(그의 내적 자아)으로 들어갑니다. 그 때 사람은 사리 판단을 따라서나 그가 공부하여 이해한 바에 따라서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 그곳에 이끌려오지 않고도 그 자체의 원천이나 샘으로부터 나오듯이 영혼의 “근저”로부터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그분을 맛보고 향유합니다. 저수지의 물은 부패하고 증발되지만 샘은 흐르고 솟아오르고 분출되기 때문에 샘이 저수지보다 낫습니다. 그것은 주워들은 지식이 아니고 참된 것이며, 참으로 감미로운 것입니다. (성지주일 전 화요일 강론)


하느님의 활동에 의해 신비스럽게 이루어진 내적 들어올림과 정화에 따라 오는 영혼의 “근저”와 하느님과의 깊은 접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타울러의 또 다른 글이 있습니다. 앞의 글은 중국 고사의 샘과 유사한 반면, 이 글은 “신비스러운 천둥” 소리와 비슷합니다.


이 이후에, 우리는 영혼의 근저와 깊은 의지를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장엄함에 대하여 활짝 열고 겸허한 두려움과 자기 부정을 가지고 그분께 눈을 돌려야만 합니다. 이런 상태의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그의 덧없고 비참한 무지를 던져버리고 ‘영이 제 앞을 지나갑니다,'라고 말했던 욥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영의 지나감으로 영혼에 커다란 격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지나감이 명확하고 진실하고 본질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수록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그것을 뒤집는 공세는 그만큼 더 급격하고 강하고 기민하고 진실하고 순수할 것이고 또한 완덕에 이르는 길에서 멈추어 서게 되는 지식은 더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때 번갯불과 같이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은 명장(名匠)으로써 영혼에 자리 잡기 위해서 영혼의 근저를 빛과 의지로 가득 채우십니다. 사람은 그 명장의 현존을 의식하자마자 완전히 복종하여 그 작업을 그분께 넘겨주어야만 합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두 번째 강론 # 5)


이 미묘한 문제에 대해 어떤 은유도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명백합니다. 타울러의 “근저”는 그 어떤 것도 세울 수 있는 기초인 바위와 같이 우리 존재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경우에만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식간에 바위이기를 멈추고 투명하고 빛이 가득 넘는 영적 “바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단하고 고체적인 성질을 지닌 동시에 투명하고 투과적인 성질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위이며 공기인 듯합니다. 그것은 번갯불과 같이 갑자기 내부에서 튀어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근저‘라는 생각은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암시합니다. 요컨대 신비가들의 언어는 항상 시적이며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상징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그들의 능력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는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파격적 역설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적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외적 자아의 문제와 욕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내적 중심을 발견할 수 없고 거기에 계시는 하느님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타울러는 바로 위에 인용된 글에서 그가 “본질적인 영향”이라고 표현했던 감각적 경계이며 일시적 갈등과 관계있는 것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조차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합니다.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의식적이거나 반의식(half-conscious)적으로 느끼는 감각의 평범한 흐름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문제이지만, 또한 더 명확히 말하자면 무의식적 충동과 지나친 열망을 요구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존재의 내적 지성소에 들어가는 자유는 기쁨을 추구하고 편안함을 좋아하고 화를 잘 내고 자기과시 하기를 좋아하고 자만하거나 허영과 탐욕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추구하는 등 자기만족과 감각적 만족에 종속되어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5)은 이 모든 자유에 나아가 “신앙”으로 향하는 것까지도 포함시킨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신앙은 실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어둔 밤”입니다. 신앙이라는 이 어둡고 사랑스러운 인식은 이승에서 하느님과 합일을 하는 도구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저승에서도 하느님을 명확히 뵙게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영광의 빛입니다(갈멜의 산길 제2권 24장 4).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하느님의 계시적 권위”에 의해 믿도록 제시된 교의적 진리의 산길보다 더 한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빛을 “받는” 것이고 영성 생활의 필연적 시작이거나 재개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들임에서 본질적 요소는 감각, 애착, 상상과 지성에 호소하는 다른 모든 “빛”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에게 신앙은 하느님께 향함인 동시에 안 보이는 존재(하느님)를 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창조물로부터 완전히 눈을 감는 되돌아섬입니다. 그에게 이 두 가지 생각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고 그 불가분성은 그의 물러설 수 없는 논리와 엄격한 수덕생활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에서 단지 눈감는 것이 신앙은 아니며 신앙을 낳게 하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신앙은 정신을 눈부시게 비추어 다른 실체에 대한 모든 시력을 빼앗는 그런 지고지순한 광명의 빛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새로운 빛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그 빛 안에서 거룩하게 변모되고 높이 들어올려져서 모든 실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성인은 말합니다.


영혼에게 내린 이 신앙의 절대적 빛은 오히려 캄캄한 어둠입니다. 왜냐하면 큰 것이 작은 것을 제압하여 없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빛이 다른 빛들 없애 버림과 같고 그래서 태양이 비치어 우리의 시력을 눈부시게 하면 다른 빛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갈멜의 산길 제2권 3장 1)


물론 이것도 역시 은유입니다. 외부의 것에 대한 “눈멀음”은 해석과 평가의 문제입니다. 관상가는 외적인 실체에 대해 ‘알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상가는 더 이상 그것에 ‘인도되지’ 않습니다. 관상가는 더 이상 그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관상가는 더 이상 그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관상가는 그것을 더 이상 욕망이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으로 가득 찰 때까지 자연스럽게 소위 비어있는 채로 놔두는 새로운 방법으로 평가합니다.

신앙의 “어둔 밤”동안, 우리는 가시적이고 유형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각적 징표나 이성적 이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희망이나 기쁨이나 두려움이나 욕망이나 슬픔에 사로잡힌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고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모든 욕망을 넘어서고 어떤 인간적이거나 현세적인 만족도 추구하지 않는 “어둔 믿음“에 의해서 본질로 인도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 본질적 이탈은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사람도 하느님께서 거주하시고 그분의 은신처이며 성전이며 성채이며 형상인 그의 가장 은밀한 내심으로 들어가기를 희망할 수도 없고 그 내적 자아를 인식하는 경험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어떻게 발견하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다음과 같은 답을 듣게 됩니다.

      

아무것에도 만족을 바라지 말고 여러분이 알아야 할 이상으로 더 맛보고 알려고도 하지 말고 신앙과 사랑 안에서 그분을 찾으십시오. 이 둘은 장님의 안내자여서 여러분이 모르는 길을 통해 하느님께서 숨어계신 곳으로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우리가 말했던 저 비밀은 영혼이 하느님께 가는데 사용되는 발과 같고 사랑은 영혼에게 길을 알려주는 인도자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의 능력으로 알아듣는 것에 매달려 멈춰 서지 마십시오. 다시 말해 하느님께 관해 여러분이 이해하는 것에서 만족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관해 여러분이 이해하거나 느꼈던 것을 사랑하거나 즐기는 것에 안주하지 말고 그분에 관해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느끼지 못했던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했던 신앙 안에서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시고 숨어계시기 때문에 … 설령 여러분이 그분을 찾았다고 생각되고 그분을 맛들이고 붙잡았다고 여겨져도 역시 그분을 숨어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숨어계신 분께 하듯이 은밀한 방식으로 봉사해야만 합니다. (영혼의 노래 1, 11-12)


그런데 우리를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우리 자신을 넘어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우리를 해방시키는 이 신앙과 사랑의 여정의 끝에 있는 그 신비적 삶은 영혼이 하느님과 소위 ‘하나의 영혼’이 되기 위해 완전히 “그분 안에서 변모될” 때에만 가능하며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현존 체험에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이런 드러남을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 비자발적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지배자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주관자로 보여 지는 영과 권능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그 초자연적이고 하느님적 생명의 거대한 활동인 우리 안에 계신 ‘말씀’에 대한 “자각”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성 요한이 말하기를:


마치 누구에게 궁전(영혼의 중심)을 열어줄 때 그곳에 사시는 존엄하신 분을 보고 그 분이 거기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한눈에 슬쩍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잠 깨임과 눈길이 영혼 안에 이루는 바를 나는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영혼은 실체로는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하느님 안에 있으므로, 하느님은 당신이 계신 그대로 영혼이 볼 수 있도록 영혼의 눈을 가리고 있는 여러 휘장에서 몇몇을 들어올려 주십니다. 이때 영혼은 투명 막을 통해서처럼, 모든 휘장이 들어올려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약간 어슴푸레하게 은혜와 아름다움이 지극하신 당신의 얼굴을 힐끗 보며 동시에 당신 능력으로 모든 것을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에게는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당신께서 피조물 안에서 움직이시고 피조물들은 당신 안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움직이고 잠깨는 것이 영혼에게는 하느님께서 움직이시고 잠깨시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사랑의 산 불꽃 4장, 7)


이것은 내적 자아의 자각과 하느님에 대한 필연적 인식에 대해 그리스도교 관상가들이 말했던 전형적인 내용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의 은밀한 “나”는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이기 때문에, 그 “나”가 깨어날 때, 그 ‘나’는 자신 안에서 그 모상의 원형인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 표현을 넘어선 역설에 의해 하느님과 영혼은 하나의 “나”만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영혼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마치 한 사람인 듯합니다. 하느님과 영혼은 한 사람처럼 숨쉬고 살고 행동합니다. 그 “둘”중 “어느 누구도” 객관적 대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배생활” 하고 있으며 이 은밀한 자아로부터 소외되고 “낯선 곳”에서 눈이 멀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에게, 이 주장은 거의 믿을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잠에서 깨어나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고 그분의 하늘나라이고 (방탕한 생활 끝에 돌아오게 되는) “아버지의 집”인 참 자아라는 내적 지성소를 찾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일 뿐입니다.











[제 3 장]


사회와 내적 자아


지금까지 내적 자아에 관해 우리가 인용했던 본문들은 이 내적이고 영적인 일치가 단지 이탈과 내향성에 의해 회복되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줍니다. 이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내적 자아는 우리가 외적 실체로부터 되돌아설 때 남아있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어있음이나 무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은밀한 자아를 단순히 외적 대상의 세상과의 접촉이 완전히 단절된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적 자각에 대한 탐구에서 철저한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어떤 내향성과 이탈이 우리 자신 안에 은밀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깨우기에” 적절한 조건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할지라도 그 영적 “나”는 분명히 외적 대상의 세계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주관적” 세계와도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적 자아를 인식하려면 우리는 이 관계가 얼마나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어떻게 우리가 사물에 대한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 당황스러운 복잡하고 독립적이고 다양한 외적 세계를 살펴보려고 하는 대신에, 즐거움이나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것으로 대상을 보려는 대신에, 우리 자신을 욕망, 도발, 의심, 탐욕이나 두려운 모습을 가진 대상에 대응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대신에, 내적 자아는 세상을 더 깊고 영적인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선어(禪語)에서 내적 자아는 사물들을 “긍정이나 부정이 없는”, 즉 기울어진 사고와 판단에 의해서 진실을 조작하고 왜곡할 필요가 없는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더 높은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내적 자아는 사물을 편견이나 왜곡된 언어의 장막 뒤로 숨기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볼뿐입니다. 예를 들어, 편견에 물들지 않고 너무나 순수한 아이가 “새로운” 시각으로 나무를 보는 것과 순전히 이익의 추구와 사업적 시각으로 제재업자가 나무를 보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제재업자도 나무가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나무의 키와 두께를 보면 널빤지가 얼마나 나오는지 금방 계산할 수 있는 그의 습관적 인식을 고려하면 완전히 관념적이고 덧없는 생각입니다. 이 경우에 “나무”나 숲에 대한 한사람의 관점에 어떤 것이 더해져 그 관점을 수정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동방 교회의 교부인 마버그의 필록세누스(Philozenus of Mabbugh)1)는 “진리에 대한 ‘단순하고’ 손상되지 않은 관점에 거짓 믿음이 더해지고 그래서 올바른 앎이 거짓 긍정과 부정에 의해 왜곡되어 신앙이 타락하는 것이 원죄”라는 독자적이고 미묘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적 신앙을 가장 비웃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현실 사이에 이기주의와 관능적 애착의 환영에 기초한 믿음의 장막을 치는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이 믿음이 독단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더 더욱 치명적 기만입니다. 사실 그 믿음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대체로 외적 인간에 의해 조작된 객관적 대상의 왜곡이고 나아가 그 자신에 대한 더 큰 왜곡입니다. 그런 믿음은 사람들의 내적 소외감으로부터 나오고 커집니다.

하여튼, 필록세누스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외적 실체에 대해 숙고하려고 할 때 그것에 마음을 쏟게 되는 자기기만의 구름을 제거하려는 선불교의 인식론적 기초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선은 주체-객체의 이원적 경험이 파괴되는 직접적인 관점을 찾습니다. 그래서 선은 어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질문 등에 명확하고 추상적이고 교리적으로 대답하기를 결연히 거절합니다. 제자들이 정신과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 사이에 추상적 의미를 슬그머니 집어넣으려는 온갖 시도를 의도적으로 좌절시키는 스승의 선문답의 전형적인 한 예화가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 묵상에 잠겨 앉아 있는 야쿠산(Yakusan)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야쿠산은,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게으름 피며 앉아 있는 것이군요.”

      “게으름 피며 앉아 있는 것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고 있지 않는 이

         ‘아무 것’이란 무엇입니까?”

      야쿠산이 대답하기를, “고대의 현자들조차 모른다,” (스즈키, 선의 연구, p 59)


그리고 제자들이 스승에게 교리적 설명을 기대하며 “선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본다면, 그들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라거나 “저쪽에 있는 기둥에게 물어보게.”라거나 “선은 앞뜰에 있는 저 편백나무일세!”라는 답을 얻을 것입니다.

외적인 사람은 모든 현실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그 실체를 볼 수 없게 하는 경제적이거나 기술적이거나 쾌락적 관점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리고 물론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그 같은 사람의 연구에 영예를 주는 직관적이고 종합적 관점과 같은 그런 주목할 만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물질적 관심이나 기술적 추론에 의한 주체-객체 관계에 대한 이런 과장은 관상에 대한 심각한 장애 중의 하나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에 관한 관점은 (비록 “관상”이란 말에 대한 매우 특수하고 제한된 의미로 사용한다면) 20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관상적” 업적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물론 여기에서의 시각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이론적입니다. 그러나 원자 폭탄도 어느 정도는 그 기원이 그런 “관상가들”의 덕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내적 통찰력이 어느 집단이나 나아가 인류의 일원으로써의 자신에 대한 인식에 반대하여 개인적인 자기 확인의 결과로써 오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 구분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내적 자아의 발견은 우리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라는 사실에 대한 반영만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개인적인 자기 확인의 일부분이지만 그 자기 확인이 내적 자아를 인식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존재를 완전하게 채우는 “당신”과 직면하는 “나”가 한 집단의 일원으로써 자신을 먼저 인식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순수한 내적 자기실현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적 자아는 다른 것을 그 자체에 대한 한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보완, 자신의 “다른 자아”로 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다른 것과 동일시하여 그 둘을 “하나”라고 봅니다. 사랑 안에서의 이 결합은 내적 자아의 가장 특징적 활동 중의 하나인데,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그 내적 “나”는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사실상 영적 고독의 수준이라는 더 높은 수준에서 다른 것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작용인 이 영적 인식은 “긍정과 부정”의 수준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교 관상적 인식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플라톤주의(역자 주:플라톤 사상과 동양적 신비주의 결합한 것)적 의미에서의 단지 “절대자와 함께 있는 혼자”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형제들”과 함께 있는 한 사람입니다. 그의 내적 자아는 사실상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신비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나”들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래서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 하나의 “신비체”를 형성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21-22)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자아실현은 자신의 개별적인 인격에 대한 개인적 확인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내적 “나”는 확실히 우리의 가장 개인적인 고독의 지성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것이 우리와 직면하는 “당신”과 일치하는 우리 안의 가장 고독하고 개인적인 내적 “나”라는 말도 맞습니다. 우리는 각자 안에 있는 내적 자아가 다른 사람의 가장 은밀한 영혼을 직면하도록 충분히 깨어난 후에야 가장 깊은 수준에서 서로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상호 인식은 “성령 안의” 사랑이고 실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성 바오로에 따르면 우리 각자의 가장 은밀한 자아는 우리의 “영”, 혹은 네우마(pneuma-영, 정신)이며, 다른 말로 하면 실로 우리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분 자신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자각에 의해 우리는 “성령의 결속”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그때 “그분을 사랑하는 하나의 그리스도”가 됩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시편 41편 주해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 자아의 인식에 대해서 말하고 하느님은 내적 자아를 “넘어서” 인지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랑에 의해 그 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심 깊은 사람들의 영적 “자아”를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인지하게 된다는 이 확신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못 인도되지 않으려면 이 모든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합니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집단이나 그와 비슷한 것에서 하느님을 인지할 수 있다고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단지 외적이고 법적인 사회 이상의 것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초자연적인 그리스도는 그 생명이 사랑인 영적 몸이거나 조직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힘으로 사람은 신심 깊은 사람들 모두 안에 그리고 그들 모두를 초월해서 살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집단적 자아를 넘어서 설 수 있습니다.


극기와 하느님의 종들의 미덕이라는 이 신전 (교회)에서 내가 얼마나 탄복하였는가! 나는 영혼 안에 있는 그 미덕의 존재에 탄복했다. … (그러나 그 영혼은 신전을 지나 하느님의 집으로, 즉, 성인들안에 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그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께로 갔다.) 그리고 내가 하느님의 집에 왔을 때 나는 깜짝 놀라서 말을 할 수 조차 없었다. 하느님의 지성소, 하느님의 집에는 오성(悟性)의 샘이 있었다. 시편저자가 하느님의 집에 갔다는 것은 마치 거기에 있는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어떤 악기가 감미로운 소리를 내듯이 어떤 환희,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기쁨에 이끌려 그 신전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 달콤함에 이끌려 내부의 어떤 소리를 듣고 그 신전으로 올라가면서 그 소리의 안내에 따라 모든 육체적 소음에서 벗어나 그는 하느님의 집에까지 나아갔다. (버틀러의 서양 신비주의 p. 23)


여기에서 내적 자아의 생명이며 깨달음인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자아들의 존재와 영적 영향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정말로 분명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자아의 인식을 그들 안에 “성령”께서 살고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덕행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성의) 함양”은 서로서로 안의 내적 영의 이런 상호 인식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표징의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내적 자아의 인식은 완전히 사랑의 작용이며 사랑할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단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내적 “나”를 깨웁니다. 그런데 이전에 설명했던 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경우와 같이, 다시 여기에 초월에 대한 필연적인 움직임이 나와 “육체” 위로 “영혼”을 들어올려야만 합니다.

“육체를 넘어선” 사랑은 핏기 없고 열정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정이 무욕에 의해 승화되고 정화되어 더 이상 단지 타고난 본능에 고무되어 이끌려가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우리 자신의 찰나적 호기심이나 기쁨을 추구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우리 자신의 이익 사이의 모든 반목을 넘어서서까지 그 사랑은 사랑 자체를 위한 사랑을 믿으며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그것이 진실하고 선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이룹니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최고의 선(善)이며 다른 사람들의 선이며 이와 같은 사랑 안에서 “모두는 하나입니다.”

물러남으로써 내적 인식과 자아실현을 완전히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고독이 홀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는 시각을 얻으려면 어떤 퇴거의 움직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수준에서는 더 이상 감언이설이나 이기적인 동기로 종속을 불러올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문제는 없기 때문에 이 이탈은 우리의 고독이 상실이 아니라 완성이 되는 그 높은 수준의 일치를 위한 것입니다. 영적 자유를 위해서는 고독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 자유가 획득되면 고독은 더 이상 종속이나 예속이 없는 사랑에 대해 봉사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유로 되돌아가지 않는 단순한 퇴거는 영혼을 결코 내적 자아가 깨어나지 못하는 움직이지 않고 죽음과 같은 무력함으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빛도 없고 어떤 소리도 없고 오직 무덤의 침묵과 어둠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적이고 고독한 “나”안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역설적인 일치의 회복과는 다르게 그 자신의 깊숙이에 있는 외적 자아의 거짓 물러남은 해방 보다는 구속의 물러남이고 다른 사람의 내적 자아와의 참된 접촉을 불가능하게 하는 물러남입니다. 내가 그 자신의 “깊숙이”에 있는 “외적 자아”에 대해 말할 때, 나의 은유적 표현을 적절한 한계를 넘어서 강조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신경과민적이고 정신병적 혼란의 중추가 자리 잡고 있는 깊은 무의식은 사실상 사람들의 외적 자아에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외적 자아는 의식의 범위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대신해서 유아적이고 무조건적인 수용을 나타내는 초자아에 대한 프로이드의 개념은 외적이고 이탈된 자아라는 나의 생각과 매우 잘 어울립니다. 그것은 완전히 외적이지만 동시에 무의식 속으로 숨어듭니다. 프로이드의 “이드”라는 개념이 외부적 자극에 반응하는 기쁨이나 파괴로 향하는 본능적 욕구의 무의식적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이상 정말 그렇습니다.

나는 이것이 거짓 신비주의와 가짜 신심을 설명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와 영성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외적 자아의 더 어둡고 비밀스러운 수준으로 물러나는 거짓 내면화의 형태이며 결국 외적 자아는 외부의 힘에 자신을 내어주고 복종하게 됩니다. 이 거짓 내적 자아와 외적 실체 사이의 관계는 아주 심각하며 거의 마법적인 강박관념으로 완전히 채색되고 왜곡됩니다. 그 자체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부드럽고 믿음직스럽고 이기심에 대한 잔꾀도 없이 다른 이들을 만나러 나아가는 내적 자아의 자유와 자발성 대신에,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을 “신비적으로” 간파한다고 주장하며 외적 실체에서 보는 불길한 “징조”를 그 자신의 확장된 두려움과 정욕과 힘에 대한 욕구로 해석하는 피해망상증 환자의 아주 심각하고 극단적인 망상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런 상황에서는 질식해버리고 관상은 그 안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눈이 부시고 초자연적인 빛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무겁고 칙칙하고 편향되고 어두운 망상입니다. 그것은 지배에 대한 위험한 욕망, 거짓 환시와 종말론적 위협, 영적 탐욕, 그리고 성도착증에 대한 잠재 요소로 채워진 망상으로 이루어진 왕국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이런 저런 식으로 그들의 참된 내적 자아의 자각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건강한 사회적 형태의 종교는 어느 정도 그 신자들 각각이 그 자신을 특히 더 높은 수준에서 찾을 수 있도록 그 집단과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주려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경건하고 영적인 형태의 모든 종교는 개인이나 집단 모두의 관상적인 자각을 적어도 내재적으로 열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열정의 애초의 자극을 잃어버린 그런 형태의 종교나 예배는 더욱 더 그 관상적 목적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위하거나 어떤 효과를 위해서 숭배 받는 대상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고 그들이 믿게 된 예식과 예법에 대한 배타적 중요성에 집착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형태의 종교적 예배는 그 성과와 실현을 관상적 자각과 초월적 영적 평화, 그리고 감각과 황홀경을 넘어서는 하느님과 그 구성원들의 유사 경험적 일치에서 찾습니다. 가장 낮은 형태는 달램을 받는 신적 존재로부터 마법적 효과를 쥐어짜는 기회를 일시적으로 주는 예식에 의해 “만들어진” 신비롭고 마법적 느낌의 힘으로 실현됩니다. 이 두 극단 사이에는 여러 수준의 황홀경, 고양, 윤리적 자기실현, 법적 정의, 미적 직관들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모든 방법으로 소박하거나 세련된 종교, 조잡하거나 순수한 종교, 활동적이거나 관조적인 종교는 내적 자각에 이르려고 하거나 적어도 내적 자각에 대해 외견상으로나마 만족할만한 대체물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은밀한 영혼에 정말로 깊이 스며든 종교는 거의 없으며 사회적 형태와 전례적 형태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종교조차도 신자들 각각의 가장 은밀한 “나”에게 반드시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보다 열등한 보통 수준의 종교들은 신자들의 집단적 잠재의식 속 어딘가에, 대개 집단적 외적 자아에 자리 잡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전체주의적 종교와도 같은 국가나 계급에서 확실히 증명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나 사람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야만성에 의해 빚어지는 전쟁 등 우리의 현대적 야만성의 가장 위험한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그것은 더 나아가 과학 기술 사회에서 사람이 증오, 공포, 지도자에 집중되는 노골적 열광, 선전 문구, 정치적 상징 등에 흥분해서 아무 때나 마음대로 일종의 정치적 광란으로 이끌리는 거의 완전한 소외의 수준으로까지 사람을 격하시킵니다. 이런 종류의 광란이 어느 정도까지 “만족스럽고” 일종의 영적 카타르시스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내거나 적어도 긴장의 완화를 유발시킨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너무나 자주 입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점점 더 그것을 순수한 종교적 실현과 도덕적 행위와 관상 그 자체에 대한 대체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단지 종교적 신비와 “자아”의 집단적 환영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해 왜곡되고 만족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써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은밀한 내적 자아의 회복을 위해 함께 나누고 있는 본질적 염원 대신에 점점 더 일반화되었습니다. 이 대체적 내면화의 발견이 무의식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처럼 느껴지며 무엇보다도 탁월함과 무류성에 대한 그럴싸한 보장이 있습니다. 집단적 분위기가 본시 아무리 잔인하고 비열하다고 하여도 우리가 그것에 몰두함으로써 즐기는 개인적 권리의 달콤한 상실이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신약 성서가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모든 진정한 자아가 상실되고 모든 것이 미쳐버린 집단에 깃든 핏기 없고 흉포한 심상의 노예가 되는 가짜 그리스도인 듯 합니다. 

참 종교와 거짓 종교, 참된 내면성과 거짓 내면성, 거룩함과 악마에 홀림, 사랑과 격분, 관상과 마술 사이의 차이를 항상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경우에 내적 자각을 향한 열망이 있으며 선이나 악, 건강이나 병, 자유나 강박관념에 본질적으로 좋던지 보통이던지 똑같은 수단이 사용될 것입니다.

      

상징은 내적 자각에 순응하는 모든 종교적 활동에서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역할을 합니다. 자각 그 자체가 어떤 징조가 되기도 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신화가 미술, 전례, 종교적 행위, 춤, 음악 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주요한 희생제를 아우르는 성직자의 노래나 기도는 그 자체로 보통 매우 상징적입니다. 더 높은 형태의 종교는 신화에 대한 예식 조항이 영성 생활에 대한 직관이나 신과의 일치에서의 완성의 역할을 하는 “신비”안에서 영혼의 자각이나 하느님과의 일치가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가장 높고 영적인 예배에서만 외적 전례와 내적 인식 사이의 진정한 연결이 명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종교가 그 열정을 잃고 정형화됨에 따라 신자들은 믿음이 너무 약하고 흐트러져서 어떤 내적 인식도 이끌어 낼 수 없는 단계에서 살게 되고 그 단계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진부해진 종교는 은밀한 자아에 호소하지 않고 외적 자아의 무의식적 정서를 자극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이 경우에 진정한 내적 인식은 없으며 전례적 예배에 표현된 확신은 더 이상 영적이거나 개인적이지도 않고 자유롭지 않습니다.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은 입만 살아있고 마음은 정화시키지 못하는 이런 외적인 예배를 통렬히 비난했고 예수님 자신은 그런 부분 때문에 바리사이들을 견책했습니다. 종교적 열정의 참된 회복은 이런 저런 식으로 종교적 활동에 대한 깊은 내적 관심을 회복함을 목표로 하며 상징적 전례와 신비와 기도에 의해 초래된 내적 생활의 쇄신과 정화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기계적이고 강제적 형식주의를 제거하고 내적이고 자발적인 “가슴”의 열정을 깨우는 문제입니다. (비록 구약 성서에서는 다른 기관, 예를 들어 창자나 “신장2)으로 그냥 그렇게 대신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슴“은 대체로 내적 자아의 적절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종교적 자발성의 근원을 나타내려는 육체적 상징을 이렇게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것은 내적 자아의 인식을 대신할 어떤 감정적이거나 정서적이거나 성적인 것이나 심지어 환각적인 것을 확실히 약속해주지 않습니다.

예배가 타락함에 따라 관례화에 따른 억압을 깨뜨리고 상징적 예식에 외관상 생명과 힘을 회복시키려는 자극적인 매개체를 사용하려는 추세가 끝없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해방을 얻으려고 술과 마약을 복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방된 “내적 자아”는 “나”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보통 양심, 습관, 관습, 금기나 마법적 두려움에 의해 자동적으로 억제되는 잠재의식적 본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얻은 해방은 영적이기 보다는 물질적인 것이고, 그 결과는 환경에 따라 유익하거나 유해한, 그리고 고통스럽거나 만족스러운 심리적 에너지의 폭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종교적 “자극”을 잃어버린 상징의 점진적인 퇴보와 잔인성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입니다. 멕시코의 종교에 대한 연구를 해보면 무한한 관상적 가능성을 가지고 땅의 수확물을 제물로 바친 매우 영적이고 정화된 예배로 시작하여 전쟁과 사람의 희생에 초점을 맞춘 아즈텍(Aztec)의 피에 굶주린 전사적(戰士的) 제사 양식으로 조금씩 발전한 전개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심장을 태양에 대한 희생 제물로 바치는 아즈텍 제사는 “은밀한 자아”가 순수하고 영적으로 나타나는 것의 일종의 끔찍한 모방을 암시합니다. 사람이 그의 내적 영혼의 숨겨진 얼굴을 하느님의 면전에서 해방시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자기 망각과 사랑에 의해 그의 외적 자아를 “희생물”로 하느님께 바치는 대신에 여기에서는 집단적 잔인성을 가진 제관의 대리자들이 사람을 산제물로 붙잡아 그 심장을 날카로운 칼로 잘라 태양의 굶주림을 만족시키기 위해 피가 흐르는 심장을 높이 들어 올립니다! 개인과 개인의 자유가 또 다시 그 의미를 잃고 개인이 집단의 번영과 권력이 의존하게 되는 정치적 우상에 대한 희생 제물로 바쳐질 준비가 된 소모품일 뿐인 그 집단적 야만성으로 되돌아가는 오늘날 이 예는 우리에게 많은 묵상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예들이 원시적이고 “이교도적인” 종교에 대한 속단을 정당화시키는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모든 종류의 종교의 어디에서나 우리는 높거나 낮거나 영적이거나 천박하거나 아름답거나 음탕한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한편에서 술 취한 여자들의 떠들썩한 주연이 있으며 성전 매음이 다산 숭배집단에서 우리 자신의 내적인 관상적 비밀의 발견을 대신한다면, 다른 편에서는 순수하고 가장 숭고한 신비가 있고, 특히 극동 지방에서는 지극히 세련되고 우아한 형태의 정신적 관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실로 원시적이었으며 한 동안은 끔찍하게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구렁텅이 위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박하고 평화로움 속에서 바르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의 모범은 (정확히 말해 이사악의 경우에서) 19세기의 가장 세련된 종교적 사상가인 실존주의의 아버지 소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3) 에게 많은 묵상 재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예배 생활을 하고 있는 수 인디언(Sioux Indian)중에서 우리는 기묘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과 “통찰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관상적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공동체적 편견도 따르지 않고 오직 개인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영감을 따르는 젊은이는 기도와 의식을 통해 준비를 하고 나서 위대한 영으로부터 “답”을 구하려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며 홀로 며칠을 지냅니다. 이런 원시적인 영적 훈련을 통해 인디언들은 내적 자각이나 심지어 (자연스러운) 유사 예언자적 소명에 대한 심오하고 참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중국이나 인도나 일본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방에서는 종교와 명상 생활이 수 세기에 걸쳐 육성되어 왔고 비할 데 없이 풍부한 발전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시아는 수세기 동안 거대한 수도 공동체의 대륙이었습니다. 동시에 수도원보다 눈에 띄지 않는 곳, 숲 속 깊은 곳이나 산이나 사막에서건 독거 생활이 꽃을 피웠습니다. 힌두 요가는 여러 가지 형태로 거의 동양 명상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요가는 사람에게 강요되는 물질적인 것의 한계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다양한 훈련과 금욕 수행을 사용합니다. 힌두교건 불교건 동양 어디에서나 우리는 천국의 강에 대한 그런 깊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목마름을 발견합니다. 이런 형태의 명상 뒤에 있는 것이 철학이건 신학이건 간에, 절대자와 일치하는 은밀한 자아로의 회귀, 모든 것을 능가하고 모든 것 안에 있고 홀로 존재하는 그분에 대한 추구는 항상 같습니다. 또한 흔히 그러하듯이 자기본위적인 동양의 신비가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도 그 자신의 방법으로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구원을 찾습니다. 그도 성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 그러나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로마서 8:19-21)


바오로가 말한 “멸망의 사슬”과 카르마(karma-갈마, 업)라는 힌두교의 개념 사이의 유비에 유념하십시오. 서양에는 힌두 종교에 대한 또 다른 경솔한 일반화가 있는데 그 정반대의 것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힌두에는 어떤 “인격적 신”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백티 요가(bhakti yoga)의 신비주의는 때때로 많은 서양 신비가들의 “결혼의 신비”를 상기시키는 가장 개인적이고 인간적 형태로 신에 대한 감정적 헌신과 희열에 넘치는 일치에 대한 신비주의입니다. 단순히 서양 형이상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에 기초하여 이런 저런 형태의 요가를 비판하는 것은 올바르지도 않으며 계몽적이지도 않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서양 형이상학과 요가 사이에는 공통적인 근거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힌두교와 그리스도교사이의 차이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거나 무관심하게 옆으로 제쳐둘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 차이들이 이해하거나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고 그 설명에 대한 근거가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바가바드 기타4)(Bhagavad Gita-바라문적 요소와 다른 요소를 결합한 교의(敎義)가 전개되는 종교 철학시)는 플라톤이나 호머와 같이 대학의 인문학 과정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동양의 그 고상한 종교 문학이 적어도 미국에서 교양 교육의 기초를 형성하는 “명저”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이상합니다. 고대 산스크리트 철학 시, 기타(Gita)는 크리슈나신(神)에 대한 개인적 헌신, 평온, 이탈의 명상적 방법을 설명하고 무엇보다도 결과를 걱정함 없이 다만 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행해진 이탈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성 베르나르도와 타울러와 페넬론과 많은 서양 신비가들이 설명한 것과 여러 가지 점에서 닮은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모든 현세의 업적으로부터의 이탈과 마찬가지로 관상의 기쁨으로부터의 이탈함도 의미합니다. 나중에 설명할 “감춰진 관상”5)은 ‘행위 속에 숨겨진 관상’에 대한 가르침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인 듯 합니다. 은밀한 자아에 대한 관상적 인식이나 나아가 은밀한 자아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지” 속의 평화는 기타에서 요가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봅시다!


      바람을 피한 등불이 흔들리지 않고 탑니다;

      그것은 감각의 폭풍으로부터 차단되고 하늘을 향해 밝게 타는

      요가 수행자의 정신과 같습니다.

      정신이 차분히 내려앉고 거룩한 풍습으로 진정될 때,

      자아가 자아를 묵상하고, 그 자체로

      위로받을 때; 그것이 영혼에

      영혼에만 드러나는 모든 감각을 넘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알게 될 때 -

      그리고 더 먼 진리를 향한 동요가

      진실이 아님을 알며 …

      … 그 상태를 “평화”라 부르고

      그 행복한 이탈을 “요가”라 부르리.


요가 수행자는 그 자신의 에고(ego-자아)에 비춰진 외적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살고 계시고 드러나시는 그 내적 자아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시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재론적 이론에서 나온 것을 고려하면 이 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잘 어울립니다.

기타(Gita)의 이 내용은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of Nyssa), 위 디오니시오(Pseudo-Dionysius)와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비교감적 신비주의에 대응하는 인도의 라자 요가(raja yoga)의 위대한 수행자 파탄잘리(Patanjali)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라자 요가의 목적은 사고의 제어를 통해 우선 높은 수준의 영적 자각 상태(푸루샤-purusha)에 이르고 그것을 넘어 개념적 사고의 “시작”을 촉진하지 않는 묵상인 “삼매경(사마디-samadhi)”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책의 뒤에 “능동적 관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푸루샤와 비슷한 것을 살펴보고 그리스 교부들이 ‘자연과학 이론’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주부적 관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그리스 교부들이 “신학”이라고 부른 모든 사고를 넘어서는 신비적 신학 혹은 순수한 관상인 초자연적 형태의 삼매경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명상은 보통 귀족들의 특권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인도에서 명상은 고령이 되어 배우자와 별거하고 고독한 명상 생활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려는 평범한 기혼자들에게도 흔한 것입니다. 또한 아시아가 수도 소명의 가장 번성하는 고향이었음은 잘 알려졌습니다. 사실, 아시아에서, 많은 경우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도생활은 멸시를 당할 정도로 친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양 종교의 영적 경험을 초자연적 수준에서라기보다는 자연적 수준에서 일어난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쟈크 마리탱(Jacques Maritain)과 가리구 라그랑제(Garrigou-Lagrange) 신부6)의 의견에 동조하여 진실로 초자연적이고 신비적 관상은 확실히 가견적 교회 밖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분 은총의 지배자이시며 성실과 진리에 대한 진지한 열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분께서는 은총의 선물을 거절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 종교에 대해 더 잘 알고 이해함에 따라 우리는 그 다양한 형태의 명상이 가진 깊이와 풍부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판단은 너무나 막연하고 근거가 빈약하며 주로 우리의 무지에 의존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늘날 어떤 특정 집단에서 유행하는 동양적 예식에 대한 바보스럽고도 무지한 열광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관상은 명백히 귀족적이며 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철학에 조예가 깊은 소수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관상은 기도라기보다는 학습과 성찰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관상에 대한 생각은,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 치우쳤고 불완전했습니다. 관상가(theoretikos-철학적 사변가)는 순수한 진리를 추구함에서 학습과 이치에 맞는 숙고를 하는데 전념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관상 생활은 지적인 사색의 생활이고 아마도 토론의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학교, 즉 대학 생활과 같았습니다. 관상가는 전문적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관상의 본질인 종교적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게다가, 사람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는 “가장 높은 선”으로써의 진리를 관상하려는 “쾌락적” 욕망은 너무 쾌락주의적이 되어 그 자신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의 첫 부분에서 관상에 대한 쾌락적 추구는 실패로 운명지어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은 고대 그리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주의 그리스도인은 (특히 오리게네스와 클레멘트) 플라톤의 지적 쾌락주의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우리도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관상 생활을 평안하고 탐미적이고 사색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집트와 근동의 사막 교부들이었던 위대한 관상의 실천가들은 그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영적 아름다움이나 지적 광채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고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뵈옵기 전에 그분의 반대자와 싸워야만 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외적 자아에 교묘히 들러붙어 있는 악마를 떼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색적 진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고 실제적인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사막으로 들어갔고, 그들의 분석적 지성의 완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정화를 위해서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사막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자는 죽을 것이요,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욕과 애착을 포기하고 외적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들은 내적인 사람,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사람을 해방시켰습니다.

“관상”이 (theoria-철학적 사변) 신약 성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잘못 인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플라톤보다 더 높고 더 실제적이며 덜 비밀스럽고 덜 어렵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관상적”이라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관상은 우리의 은밀한 자아를 밝게 비추는 완전한 믿음인 빛나는 어둠 속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경험 (혹은 준 경험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일 뿐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참하게 되는 사랑과 이해의 친교로 하느님과 영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관상”이라는 말은 오래 지속되는 기쁨, 시간의 초월 그리고 일종의 기분 좋은 수동성을 시사합니다. 관상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쾌락주의적 학설로 흐를 수 있습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행복이나 평화가 아니고 최고로 해방된 영적 사랑에 속하는 존재와 진리에 대한 초월적 경험입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만족과 휴식이 아니고 자각과 생명과 창조성과 자유입니다. 사실 관상은 사람의 최고의 영적 활동이며 가장 본질적인 영적 활동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가장 창조적이고 역동적으로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둡고 일반적으로 만족하는 “존재”와의 나른하고 기분 좋고 평안한 포옹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와 죄의 어둠을 꿰뚫는 하느님의 번개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그와는 반대로 아주 구체적이고 특별하고 “실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자신에 대한 직면이고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성자(聖子)와의 직면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자각이고 우리의 영혼 안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성부(聖父)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聖靈) 안에서 성자(聖子)와 하나가 되는 그 은밀한 “나” 안의 진리와 하느님적 자유의 승리입니다.


















[제 4 장]


그리스도교 관상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이야기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람은 관상가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낙원에서의 추방은 일치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말입니다. 플라톤주의 그리스 교부들은 인류가 두 개의 성(性)으로 분리된 것은 그 원죄의 결과라고까지 가르쳤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설화에 대해 더 신중하고 심리학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성인은 아담의 원죄에서 사람의 내적이고 영적인 자아, 관상적인 자아는 이브, 즉 그의 외적이고 물질적이고 실제적 자아, 그의 활동적 자아에 의해 타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관상적인 통찰력의 일치로부터 활동적이고 세속적인 존재의 다양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움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사람은 이제 외적이고 불확실한 것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물질적 세계에 유배되었고 스스로를 속이고 노예화되었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하느님과 그의 은밀하고 영적인 자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제는 마치 자신이 자신의 신인 것처럼 스스로를 보고 자각해야만 합니다. 그는 자신을 그가 소외되는 일종의 객체와 같은 것으로 연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소외에 대한 고통과 좌절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을 칭찬하고 옹호하고 만족시키려고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랑과 증오, 욕망과 두려움, 거짓과 사과 등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덫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의 정신은 외적이고 덧없고 허황되고 하찮은 모든 것에 대해 변하지 않는 관심을 가짐으로써 노예화됩니다. 그리고 이질적인 환영과 형상을 추구함에 넋을 잃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진실한 내적 “얼굴”을 볼 수 없으며 영혼과 하느님 안에 있는 그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정체성은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용기와 믿음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것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비참하게도 자기관찰(반성)과 자기 과신에 의존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하느님과 자신의 참 자아로부터 완전히 추방된 것입니다. 하느님이나 우리의 은밀한 자아 안에는 적극적인 자기 과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오직 사랑과 진리의 꾸밈없는 현존만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하느님과 자신의 은밀한 자아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외부에서 하느님과 행복을 찾도록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복에 대한 추구는 사실 하느님과 자신으로부터의 도피가 되고 진실로부터 그를 더욱더 멀리 데리고 가는 도피가 됩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의 지성소인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유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그의 내적 모습을 잃어버리고 “낯선 곳”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낙원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는 그 자신을 회복해야만 하고 그의 존엄성을 다시 찾고, 그의 잃어버린 정신을 다시 찾고, 그의 참된 전체성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르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우화(루가 15:8-10)에 나오는 여인처럼 하느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사람이 신인(神人)이신 분 안에서 사람으로써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으로써의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반드시 사람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모범과 증거를 사람들에게 남겨두기 위해 반드시 십자가상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며 그의 외적 자아가 파괴되고 내적 자아가 신앙의 힘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서 다시 한번 “하느님을 향해서” 살게 되는 영적 죽음을 반드시 겪어야만 합니다. 사람은 “한 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성부와 당신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1) 영원한 생명을 맛보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삶은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사랑이신 성령 안에서 성부의 빛이시며 형상이신 성자를 통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원천이신 성부께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이 회귀는 외적 자아로부터의 이탈과 “죽음”으로만 가능하며, 그리하여 정화되고 새롭게 태어난 내적 자아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으로써의 기능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며 지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성부께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실체의 근거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순수한 존재의 무한한 심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목적과 진리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과 기쁨의 가장 은밀한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망각에 의해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낙원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성부의 자녀로써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그리스도로써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형언할 수 없고 이름도 알 수 없이 숨어계신 분의 초자연적인 현존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힘과 사랑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령이시지만 그 분은 성부라고 합니다. 성자는 성령이시지만 그 분은 성자라고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만 알려진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께로 데리고 가서 성자를 통해 성부와 우리를 일치시킬 때,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비밀스런 이름을 대신하신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 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를 그분에게서 받을 때 성령의 이름을 우리 스스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나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만 그 답은 알 수 없습니다.)


1. 관상과 신학


대부분의 비 그리스도인과 어쩌면 많은 개신교인들도 육화 교리를 전문적으로 상세히 설명했던 초기 교회 교부들의 강한 열정이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고집이었고 객관적 중요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복잡한 그리스도론과 위격적 일치 교리는 결코 합리주의가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처럼 충실한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의지를 종속상태에 두기 위한 권위주의적 음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기 교부시대의 신학자들과 일반 신자들은 모두 육화 신비의 올바른 신학적 정립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교리적 잘못은 사실상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성 생활에서 실제로 재난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엄청난 숫자로 압박했던 아리안 이단에 대항해서 성 아타나시오2)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그토록 완고하게 옹호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만약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뒤이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망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가 그에 상응하게 단언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은 육화하신 말씀이신 하느님의 참된 아들로써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고린토 I 15:14-15).

얼핏 보기에는 부활에 대한 이 믿음이 관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사실 새로운 아담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인간 본성을 영적인 상태로 완전히 회복시켰고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성을 부여할 가능성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 안의 내적 자아가 이제 성령의 활동으로 깨어나고 변모될 수 있으며 이 깨어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살아있고 부활하신 구세주를 우리 안에 존재하게 해준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그분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은 신인(神人)으로써 이고 성령에 의해 우리 모두 안에서 살며 활동하실 수 있는 것도 신인(神人)으로써 이고 그래서 그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자아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초자연적인 사람, 하나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아들의 창조적 자유를 부여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모될 수 있으며 그분처럼 신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에서 그분의 영적 권능과 카리스마적 권능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아타나시오를 지지했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 중 관상적 사막 교부들이 제2위격의 신성과 말씀의 육화에 대한 단단하고 견고한 신앙 집단을 형성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동방 (정교회) 교부들과 함께 성 아타나시오가 신앙 고백 “성 이레네오를 빌어3)에서 간결하게 천명한 말,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결코 누구도 본적이 없는” 성부의 알 수 없는 그 깊은 신비로부터 나타나신 것은 단지 인류를 그분의 발아래에 두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오셨고 그 분의 위격 속에서 사람을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의 이러한 하느님과 사람의 결합의 결과로 모든 사람은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양자 입양에 의해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개인적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 대해 바람직한 법적 위치로 사람을 회복시키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안에서 드러나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외아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하느님 안에서 들어올리고 변화시키고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이 신비가 언급된 신약 성서의 본문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매우 광범위하게 무시되어 왔습니다.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은 결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격적 일치(삼위일체)의 신비와 말씀이시며,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본성적으로 결합하는 신비를 가장 위대하고 가장 변혁적이고 가장 존재론적인 실체에 대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역사의 핵심적 진리로까지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다른 모든 것의 의미를 밝히고 온 세상과 전 우주의 모든 사회와 역사 안에 있는 개인으로써의 사람과 그의 행동에 대한 내적이고 영적인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열쇠였습니다.

만약 모든 점에서 사실상 완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진 사람의 본성이 하느님의 말씀의 위격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 사실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은 바로 신적인 것입니다. 그분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분의 존재는 하느님의 위격의 일이며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람으로써의 그분을 그 본성에 관한한 모든 점에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성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셨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의식과 존재적으로는 완전히 초월적이고 신적인 수준에서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의식과 존재는 하느님의 의식이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서의 은유적 표현을 빌면) 영원토록 성부 오른편 왕좌에 앉아계신 살아있는 그리스도는 실로 우리가 표현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존재로 계시지만 이런 상태에서 그 분은 참으로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시며 그분의 신성과 인성은 나뉘어짐이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이 지상에서 사셨던 그 역사적 존재의 상태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작은 나뉨조차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본성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하여도 우리의 몸과 영혼이 우리 안에서 완전히 하나이듯이 그분의 인성과 신성은 그분 안에서 완전히 하나였습니다.

관상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첫 단계는 본질적으로 똑같이 중요한 ‘사람의 일치’를 전제로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선과 악의 논리처럼 서로에 대해 갈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결코 사악한 물질적 원리의 지배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육신을 거부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육신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입니다. 한쪽이 없다면 다른 한쪽은 절대로 참된 개인적 존재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의 육체적 삶과 존재와 행동들은 그분 영혼의 생각들과 염원과 마찬가지로 바로 그분 자신의 것이며 바로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갈릴레아의 길을 걸으셨을 때 그분은 가공의 인물도 아니었고 하느님의 대리자로써 일시적으로 나타나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에서 걸으셨던 바로 그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고백자 성 막시무스4)의 말을 봅시다.


결코 사람도 아니고 동시에 하느님도 아닌 채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진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탄생의 순간에 자신을 나타내신 지고지순의 본질이신 말씀. … 이에 대한 지혜는 이해력을 넘어서서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만 명확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불명료, 그리스 교부학, 91, 1053)


그리고 다시:

      

말씀의 육화 신비는 그 자체로 성서의 모든 불가해한 말과 상징들의 의미와 모든 가시적이고 지성적 창조물들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십자가와 무덤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의 근원이신 로고스(logos-말씀)를 안다. 부활의 숨겨진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태초로부터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게 된다. (100인의 그노시스파, 그리스 교부학, 90, 1108)


육화 이후로 하느님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나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초자연적 질서”가 외부로부터 어느 정도는 창조된 본성에 강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 본성 자체가 사람 안에서 변모되고 초자연적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살고 활동하시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성령에 의해 본성과 신성 사이의 구분이 더 이상은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의 은총에 따라 살고 행동하는 사람은 그런 경우에 하느님의 아들로써 또 다른 그리스도로 행동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삶 안에서 육화의 효과와 기적이 지속되게 합니다. 성 막시무스의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항상 가치가 있는 사람들 안에서 그분 자신을 사람이 되게 하신다.” (축하연에 대한 문제-Quaestiones ad Thalassium, 그리스 교부학, 90 321)

그러나 그리스 교부들에게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위하는 것보다 더 높고 고상한 수준의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활동에 의해 정화되고 해방된 삶이고 초자연적 관상에 의해 조명된 삶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취하셨고 우리는 세례에 의해 이미 존재의 본질상 신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적 생명은 수덕생활과 사랑의 생활에 의해, 더 높은 수준, 관상의 수준에서 더 충분히 계발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서 숨어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 자기 비움과 자기 변모를 우리 자신의 삶에서 능동적으로 새롭게 적응해야 합니다. ‘말씀’께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시기” 위해서 그분의 신성과 초월적 고결함을 “비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이 되기 위해 정말로 사람보다 못함을 의미하는 인간적인 것을 우리 안에서 비워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정말로 우리의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을 희생하거나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 그분께서 신성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으신 모든 것들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잘라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내적이고 참된 자아를 손상시키기 위한 피상적이고 인공적인 자아의 생존과 영속화에 대한 욕구나 자기 단정, 탐욕, 정욕과 같이 우리의 외적이고 자기중심적 애착에 집중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됩니다. 성 바오로가 말하기를: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고린토 II 4:16, 18)


여러분은 낡은 인간을 벗어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골로사이 3:9, 10)


넘쳐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에페소 3: 16-19)


이 성서 내용들은 비록 그 말이 관상이라는 특별한 의미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신약 성서 모든 곳에 가득한 관상에 대한 개념을 충분하고 심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으로 하느님과 영적으로 접촉할 때 생명으로 솟아나는 내적 인간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접촉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실체와 직면하게 이끌어주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 역설적인 경험은 하느님의 모상이나 “자녀”로써,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가장 은밀한 자아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하느님의 성령의 은총에 의해 야기되는 “지식”, 즉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경험과 일치하는 삶의 끝없이 깊어지는 쇄신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런 내재하심의 결과는 가득 넘쳐흐르는 새로운 생명, 사랑, 하느님의 사랑이며,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경험을 통해 모든 면에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생명의 신비에 대한 영적인 이해입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지식을 뛰어넘고 하느님 사랑의 신비의 어둠 속, “무지” 속에서 하느님과의 경험적 접촉인 그리스도교 관상에 대한 이 기본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그때 이 관상은 위격적 결합인 하느님과 사람의 결합에의 영적인 참여, 그리스도의 생명에의 깊은 참여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가진다는 교리의 완전한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로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로마서 8:14-16)


우리의 은밀한 자아(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이 “성령의 증언”은 넓은 의미로 우리가 그리스도교 배경 하에서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관상과 복음서


이제 우리 주제와 관련이 있는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짧고 간결하게 살펴봅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며 그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 그대로 하느님의 성자라고 명확하게 선언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분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0, 36-38)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 나 혼자서가 아니라. …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내가 함께 …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 처음부터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나도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서 말할 뿐이다. …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 와 있으니 …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 …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 나는 그 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 정말 그렇다.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장)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요한 14장)


이 내용들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리고 2000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비추어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는가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관상은 이 신비에 대한 믿음에 기초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써 이 세상에 오셨다면, 성부께서 그분 안에 현존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 성부께로 가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와 하늘에 계신 그분 신비 사이의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적 간격을 메울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성부 안에 계신 말씀께서 우리에게서 무한히 먼 거리에 계실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분은 무엇보다도 본시 세상의 창조주로 우리 세상에 내재하시며,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구세주(救世主)요 구속주(救贖主)로써 역동적이고 신비로운 특별한 방법으로 현존하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요점은 주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이 특별한 현존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가 입니다. 성 요한의 말에 따라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 들여야만 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바로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특별히 권위 있는 교리적 신조에 대해 지성으로 동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세상이 현존하고 계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삶과 자아를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완전한 포기의 행위는 단지 환상적인 지적이고 신비로운 도박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존재에 완전히 항복하게 되는 그 사랑의 선물로써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이 보이지 않는 위격에 대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정신, 영혼, 삶과 우리 안에 계신 말씀과의 결합은 성령에 의해 초래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계약인 최후의 만찬 때에 그분께서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선, 예수께서 지상에서 제자들과 어울려 사셨던 시기에 그들이 친숙하게 여겼던 주님의 육체적 현존과 그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죽음으로부터의 부활하시고 그분 왕국을 건설하셨을 때의 새롭고 더 친밀한 그분의 보이지 않는 현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가가 너희에게 오시기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요한 16:7, 13, 14)


이 말은 성 요한의 첫째 편지에 나오는 설명으로 완결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위에서 성 바오로가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그리스도가 깃들게 해주시는 성령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성 요한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그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는 한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 (요한 I 2:20, 27)


성령은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Donum Dei altissimi.5) 성 토마스가 말한 대로 그 분은 진실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존재 안에서 말씀하시며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영혼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소위 우리의 영적이고 하느님적인 자아가 되신 분은 그 분이시고 그 분의 현존과 격려로 말미암아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고 또 다른 그리스도처럼 행동합니다. 그분에 의해서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됩니다. 복음서와 신약 성서의 서간들을 보면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시키시며 초자연적 상태에서의 사랑과 행동의 직접적인 근원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관상의 삶은 단지 인간적 기교나 규율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영혼 안에 계시는 성령의 삶입니다. 관상가들의 모든 의무는 자신의 삶에서 속되고 하찮은 것들을 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성령의 비밀스럽고 잘 느껴지지 않는 격려에 순응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겸손, 순명, 자기불신, 분별과 무엇보다도 신앙의 지속적 훈련이 요구됩니다.

성 바오로는 그의 고린토 교우들이 성령을 받아 변화되고 그분에 의해 인도되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만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생각은 하느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고린토 I 2:7, 10-12)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관상이라고 부르는 신약 성서적 개념에 대한 중요한 증언입니다. 사람이 그 자신의 영혼, 그 은밀한 자아의 증언으로 자신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그분 성령의 사랑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져 소위 우리의 성령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살고 계신 이 하느님의 성령은 심오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자비의 실체와 현존을 알게 해주고 경험하게 합니다. 그렇게 성령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자아와 친밀히 결합하시고 우리 안에서의 그분의 현존이 우리의 “나”를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로 만듭니다.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그분의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그 성령입니다. 그 본문은 너무나 자주 성령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그리하여 교회에 주어졌다는 단지 객관적인 상황으로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교회와 특히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교리와 도덕적 오류에서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의 각 구성원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고 그분의 불가사의한 목적지로 이끄시고 각 구성원들의 삶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역사의 신비에 대해 눈이 열리게 하기 위해서 그들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구세주께서는 성령에 의해 제자들 안에서 신비롭고 영적으로 사시기 위해서 그분의 육체적이고 물질적 현존에 머물러 있는 그들을 떠나야 한다는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실에 대한 비유의 표현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모범으로써만 기억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분은 멀리에서 천사들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고 관리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자연적인 모든 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육화에 의해 메워졌고 우리 안에서 그 간격은 성령의 보이지 않는 현존으로 메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체의 눈에 보이는 존재로 우리 앞에 서 계셨을 때보다 더 진실로 우리 안에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은밀한 자아 속에 계시는 성령의 이 숨겨진 현존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외적이고 이기적이고 가공의 자아에 대한 전념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숭고한 선물인 이 발견이 보통 어떤 영적 경험의 형태를 수반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그 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 14:17)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요한 14:26)


그 성령을 통해 성부와 성자는 두 분 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이고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알고 사랑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1, 23)


그러나 우리에게 스스로 드러내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그런 지식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것과 똑같은 지복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영원한 생명은 성부께서 보내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말씀 안에서 우리를 성부께 결합시키시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하느님의 “파견”이나 사명에 중심을 둡니다. 관상은 생명과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자와 성령의 사명에 대한 의식적이고 경험적 자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시고” “받아들여진” “말씀“을 완전히 아는 것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다른 분”, 우리 영혼의 모든 것이 의지하는 “당신”으로 알고 있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의 가장 은밀한 “나”와 친밀히 결합하시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보다 더 참된 우리의 자아가 되십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와 육화된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 심오한 지식이 관상적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무한한 깊이의 기쁨과 자유를 열어 준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요한 14;27)


관상가의 기쁨은 완전한 일치에서 완성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22-23)


이 숭고한 생명의 씨앗은 세례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심어졌습니다.6) 그러나 그 씨앗은 추수하기 전에 자라나고 발달되어야만 합니다. 실제로 자기 몸 안에 계신 무한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 하느님의 자녀들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 자신과 참된 신성을 찾으려하기 보다는 폭력과 간교함과 정욕과 탐욕에 의존하는 소외된 인물을 구현하기 위해 비참하게 싸웁니다.

관상과 거룩함의 씨앗은 동면 상태로 그 영혼에 심어졌습니다. 그 씨앗은 발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라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은총은 그들 영혼의 본질에 자리 잡지만 결코 불타오르지도 않고 흘러넘치지도 않고 풍성히 자라지도 않고 그들의 정신이나 지성이나 의지를 사로잡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결코 친밀한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영혼들은 참된 소망을 가지고 그분을 찾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외적 자아에 있을 때만 편안합니다. 그들은 그들 안의 더 깊은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본질에 대한 하느님의 권리는 인정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소망은 그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과 소망은 환영과 정욕 등 외적인 것들에 속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그 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성령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이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린토 I 2:14)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관상적 선물로 성령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거절에 대한 약속도 있습니다. 성령은 그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질 것이고 그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거절될 것입니다.

성 토머스 아퀴나스는 요한복음서 14장의 말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둘의 차이점을 설명했습니다. 관상은 사람이 “세상”에 애착을 가진 것에 비례하여 거절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덧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두 가지 상반된 것은 동시에 같은 주체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성령과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야망과 외적 만족과 일시적 흥미에서 비롯된 그의 욕망을 버려야만 합니다. 영적인 것은 피상적이고 단지 외적인 만족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는 올바르게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Spitualia videri non possunt nisi quis vacet a terrenis.7)

세속적인 사람은 성령을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분은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시지 않는다고 천사적 박사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소한 것들에 기꺼이 그들의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소망은 관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Dona spiritualia non accipiuntur nisi desiderata.8) 성 토마스는 덧붙여 말합니다. nec desiderantur nisi aliqualiter congnita.9) 적어도 어떤 지식도 없다면 소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일치가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외된 사람, 완전히 외적인 활동과 일시적 관심사에 몰두하는 그리스도인은 관상을 바랄 수도 없을뿐더러 관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관상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아는 유일한 방법은 경험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달콤하다는 것을 맛보고 알아야만 합니다. Gustate et cidete quoniam suavis est Dominus.10)

성 토마스는 세속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병자의 혀가 좋은 것을 맛볼 수 없는 것처럼세상의 부패에 감염된 영혼은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성(聖)과 속(俗)


여기서 우리는 삶에 대한 성스런 관점과 세속적 관점 사이의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잠시 멈추어야만 합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아마도 매우 광범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나 창조된 우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주는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입니다. 나쁜 의미로 쓰이는 “세상”은 비록 신플라톤주의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책에서 우주를 암시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분명 우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saeculum(현세, 세속)은 일시적이고, 변화하며 순환하여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타락한 천사들(공중 권세)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그리스도교에 스며들어 사람들을 설득한 플라톤 학파와 그노시스파(역자 주:영지주의-영적 인식, 신비적 직관주의)의 영향에 기인합니다. “세속적(secular)”이라는 형용사는 라틴어 saeculum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말은 “세상”과 “세기”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 어원은 모호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순환-cycle”의 어원인 그리스어 kuklon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세속적”인 것은 무한히 순환하는 것입니다. “세속적 사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세속적 사회는 끝없이 순환하는 동일함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가삐 가고

      남쪽으로 불어 갔다 북쪽으로 돌아오는 바람은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온다. …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

      헛되고 헛되다. 세사만사 헛되다.

      (전도서 1)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의 모든 존재는 변화와 순환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자체로는 순환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항상 똑같은 것인 “순환”에 완전히 몸을 내어 맡길 때 삶은 세속화됩니다. 세속적 삶은 우리의 무가치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만 똑같은 낡은 상태로 끊임없이 우리를 되돌리는 새로움과 변화의 환영에 사로잡힌 헛된 희망의 삶입니다. 세속적 삶은 새로움과 다양성을 통해 두려움과 죽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미친 듯이 매진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더 세속적 희망을 추구할수록 그것은 더 우리를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세속적 희망이 우리를 더 실망시킬수록 우리는 더 절망적으로 그 공격에 반응하고 지난번 보다 더 엄청난 새로운 희망에로 나아갑니다. 이것도 또한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연히 탈출하려고 했던 그 비위에 거슬리는 조건으로 되돌아갑니다. 파스칼11)이 말하기를.


열정도 없고 관심사도 없고 기분전환도 안하고 공부도 안하면서 완전히 쉬는 것만큼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때 사람은 그의 무가치, 불성실, 부족함, 약함, 그리고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팡쎄 131)


“세속적” 사회는 본래 파스칼이 “오락”이라고 부른 것, 즉 무엇보다도 우리의 고통을 잠재우는 마취제 역할을 하는 활동에 전념합니다. 모든 사회는 예외 없이 어느 정도는 “세속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세속적인 사회는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에만 만족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그것은 점점 더 불공정과 악과 심지어 범죄를 추구하는 것에 의존하면서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실제 생산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존재하며 값싸고 재빨리 소모되는 상품들만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사업들이 증가합니다. 생산자들이 그 시장과 원재료를 놓고 경쟁할 때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허무주의, 절망, 전쟁 뒤에 오는 혼란, 그리고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전체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불러옵니다. 우리 세계는 전환을 위하여 폭발할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원자시대는 세속주의에 의해 이룩된 정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우리에게 세속주의의 진정한 뿌리가 무신론임을 상기시켜줍니다.

속(俗)과 성(聖)은 두 가지 종류의 의존을 반영합니다. 세속적 세상은 기분전환을 할 필요가 있고 자신의 무가치로부터 탈출하려는 것에 의존합니다. 그것은 인위적 필요성을 만들어내고 증가시키고 “만족”하는 체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세상은 사람의 자유를 고양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사람이 의존하는 것들에 의해 노예화되는 세상입니다. 세속적 사회에서 사람은 소외되고 ‘사람’이라기보다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그 자신보다 더 가치가 낮고 외부에 있는 것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끝없이 증가하는 욕구, 불안함, 불만족, 걱정,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적 진리를 배신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죄의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은 더욱 거짓 속으로 뛰어듭니다.

반면에 거룩한 사회에서 사람은 자신보다 가치가 낮거나 심지어 공간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의 유일한 지배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지배자일 때에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위에 계실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안으로부터 그 분 자신과 우리를 일치시키기 위해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들어올리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외부의 창조물에 대한 의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우리는 창조물들을 사용하고 지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조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물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거룩한 사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도성은 “문명화된 이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희생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와 동정과 사심이 없고 하느님적인 연민에 의해 하나가 된 사람들의 이 세상 사회를 반영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해방시키는 것을 돕고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되어 자신의 내적 진리를 찾고 그래서 지상에서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 자신의 즐거움이나 순간적 만족을 포기함으로써 “기분 전환”에 대한 노예화에서 해방됩니다.

지상의 가장 거룩한 사회조차도 어느 정도는 세속적 특징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와 같이 인간 본성이 타락한 상태의 가시적 인간 사회에서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신에 대한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사용할 때 모호해지고 그래서 우리는 그 표현에 머무르며 더 이상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거룩한 성체성사가 육화하신 말씀과 또한 그 분의 신비적 지체의 모든 구성원들과의 신비적 접촉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동의를 얻고 걱정을 진정시키는 방법으로써 추구될 때 그 성체성사는 일상적이고 “세속화된” 행위가 되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신성한 실체조차도 품격이 떨어질 수 있으며 그 거룩한 품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더라도 세속적 “기분 전환”의 굴레로 들어갑니다.

삶에 대한 진정으로 신성한 태도는 우리가 혼자 남겨졌을 때 우리를 맹렬히 공격하는 무가치한 느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의 무가치함이 그분의 성전(聖殿)으로 바뀌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우리의 어둠 속에 그분의 빛이 숨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그 어둠과 그 무가치함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태도는 우리 자신의 내적 무의미함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고 경외와 흠숭과 신비에 대한 인식으로 그 무의미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입니다. 외적 자아는 그것을 넘어서고 능가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적 자아의 무의미하고 어둠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기분 전환”의 커다란 비극은 바로 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진실하고 친밀하고 순수한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과 그 경험 사이에 저절로 객관적인 장막을 치려고 시도하는 생명과 경험으로부터의 도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기분전환으로부터 되돌아 나오며 외적 인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삶의 그 직접적 경험과 직면하도록 준비하는 커다란 용기와 영적 에너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성 토머스가 ‘두려움’ 혹은 신성한 경외의 선물이라고 말한)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 우리의 내적 자아를 공(空)이 아니라 무한한 깊음으로, 무의미함이 아니라 완전함으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의미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무서움과 가난과 권태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이상 이런 사고방식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뿐만이 아니라 하느님도 발견하게 해주는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때 우리의 무의미함은 그분의 모든 것이 됩니다. 이것은 친교와 겸손에 의해 만들어진 해방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재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 속에서 그 자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슬픔까지도 요구합니다.

신성한 태도는 본질적으로 관상적이고 세속적 태도는 본질적으로 활동적입니다. 그것은 (사랑에 기초한) 신성한 활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활동조차도 관상적인 경우에만 신성합니다.

삶의 시각이 완전히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듯이 보여도 내적인 자신을 증오합니다. 그는 그 자신과 “함께” 혹은 “혼자 힘으로” 설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증오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증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전에 겪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내적 고독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적 고독과 가난함에 대한 그의 반항은 자부심으로 변합니다. 자부심은 외적 자아의 고착화이며 책임을 질 수 없게 된 자아 속의 모든 다른 요소들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분명한 무의미함과 막연함과 일반적인 특성상 어둡고 알려지지 않은 가장 은밀한 자아의 거절을 포함합니다. 자부심은 결코 실제 깨달음이 아니고 단지 꾸며낸 이미지에 불과한 거짓되고 교활한 자기실현입니다. 이 환영을 보호하고 구체화하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노력이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 고착화는 실제로는 우리 존재를 피폐하게 만들고 파괴시킬 뿐입니다.

“신성한” 태도와 자신의 가장 은밀한 자아의 수용 사이에는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필연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불명료하고 알려지지 않은 자아를 받아들이는 인식 작용은 우리 안에 "초자연적인” 현존감을 만듭니다. 이 신성한 경외는 마법적 환상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내적 자아를 통해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것 그리고 하느님의 초월적이며 보이지 않는 힘과 우리 자신의 내적 재결합과 일치를 증언하는 영적 에너지의 해방에 대한 진정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겸손이나 본래 거절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의 완전한 수용을 의미합니다. 내적 자아는 죄의 인식에 의해 “정화”됩니다. 내적 자아가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내면성은 모두 똑같이 외적 자아에 의해 거부되고 똑같은 어둠으로 쫓겨 가는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내적 자아가 다시 빛을 회복했을 때, 죄가 드러나고 책임감과 슬픔에 의해 죄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성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증오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그 자신의 고독에 머무르는 것이 결코 두렵거나 창피하지 않습니다. 그 고독안에서 그는 평화롭고 그 고독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사람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을 그들의 죄와 동일시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들에게서도 그 내면을 보고 하느님의 형상인 내적이고 순결한 자아의 현존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동정을 세심히 살필 수 있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그들을 교육하면서 그들이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내적으로 조용해지고 자신의 깊은 가난함 속에 계신 하느님을 보게 될 때까지 그들의 두려움을 경감시키고 자신을 참아내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영성 생활에서의 기초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는 숨겨지고 어두운 자아에 대한 수용입니다. 우리는 식별을 통해 우리 행동의 악한 성향과 영혼의 선한 토대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을 넘고 의식적 통제를 넘어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그 토대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신성한 태도는 우리가 가장 은밀한 자아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신비에 대한 흠숭과 경외와 침묵입니다. 신앙인은 침묵과 희망과 기대와 무지 속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맡깁니다. 신앙인은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암호와 같은 독단적이고 마법적 힘이 아니라 진실과 생명 자체의 흐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신성한 태도는 어떤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더라도 그 진실을 근본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세속적 태도는 세속적 마음이 자신의 조잡한 형태를 강요하려고만 하고 진실을 매우 경멸하는 태도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과 한계의 노예입니다. 신앙인은 끊임없이 삶의 모든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 자유롭게 응답하면서 편견과 인위적인 것에 전혀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나는 신앙이 순수하지 않고 또한 외적 인간에게 부여된 또 다른 편견을(새로운 상황에서 ‘말씀(logos)’에 대한 살아있는 반응보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기 위하여 “전혀”라는 말을 썼습니다. 정말로 살아있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외적 자아에 머무르고 인습과 제도화된 편견의 생산물인 일종의 “냉혹하고” 엄격한 종교적 신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순명과 유순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하느님의 뜻과의 이러한 일치가 하느님을 관상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필요한 단계라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요한 14:15-16, 21)


그리고 그 분은 최종적이고 완전한 기준, 진실한 사랑의 증거와 관상가와 세속적 사람, 성인과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를 덧붙이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요한 14:23-24)


사람이 영적인 것에 맛 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해 정말로 이렇게 완전하고 단호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된 관상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에도 굴복하는 이런 섬세한 본능입니다. 성 토마스는 “사람이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순명을 통해서이다(Per obedientiam homo efficitur idoneus ad videndum Deum).”라고 말했습니다.
















[제 5 장]


관상의 종류


엄밀히 말해, 관상은 가장 은밀한 존재, 우리의 영적 자아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현존에 대한 직접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수동적인 직관입니다. 그러나 비록 신비롭고 보이지 않는 은총의 도움이 있긴 하지만 다소간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이런 직관을 얻을 수 있는 관상의 능동적이고 간접적인 형태도 있습니다. 수동적이고 주부적(注賦的)인 관상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것입니다. 즉 그것은 직접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계시의 본질인 실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실을 보다 더 신비스럽고 난해하게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수동적” 직관에 대한 계시는 조금 전에 인용한 요한복음서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에게 나타내 보이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행위”는 주님의 몫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그 발현을 야기 시킬 어떤 위치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해 그 발현을 증대시키거나 변경시킬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 발현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은총에 대한 고전적 표현은 그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상관없이 초래된다는 것입니다. In nobis et sine nobis. 능동적이고 간접적인 관상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 안에서 그렇지만 우리의 적극적인 협력과 함께 초래됩니다. In nobis et non sine nobis.

보통 능동적 관상 생활을 하는 사람은 주부적이거나 수동적 관상의 간헐적이고 예상치 못한 방문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능동적 관상은 그 가장 순수한 형태로 완전히 사고적인 묵상 없이 일어나는 주부적 관상의 깊고 순수함은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능동적 관상에서의 사고와 판단이나 적어도 어떤 정신적 활동에서 비롯된 신앙 활동은 어느 정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관상적 직관과 평온 상태를 위한 도약대로 이바지 합니다.

능동적 관상에는 어떤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간파하고 사람의 전 자아를 그 뜻에 조화되게 하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있습니다. 능동적 관상은 우리의 이해력을 벗어나고 모든 면에서 우리의 준비 능력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움직이기 위해서 외적 자아의 긴장에 대한 의도적인 완화와 외적 자아의 무도한 요구를 억제하는 금욕적 포기에 의존합니다. 능동적 관상의 논리적 요소는 우리 삶의 사건들이 가지는 참된 의미와 동일시 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세상의 구원과 신성화를 불러오는 하느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그런 거룩한 신비에 대한 상징과 전례 조항과의 깊은 관련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능동적인 관상은 (죽은 관습이 아니라 살아있는) 전례적,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여전히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성장을 하는 전통의 심오한 토대 위에 있습니다.

관상적 정신은 사실, 보통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지도 않고 반드시 급진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전통적 흐름에서의 정말로 참된 것과 생생한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양극단을 초월합니다. 덧붙여 말하면 오늘날 관상적 정신은 보통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전례적, 인공적, 철학적 “흐름”과도 확고한 연관을 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상가는 그 흐름이 혼란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 정형화되고 흔히 열광적인 대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 보다 그 흐름에서 벗어남으로써 더 앞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 관상은 그 시대의 말씀(logos)과 매우 광범위하게 접촉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사람들이 오늘날의 관상가에게 맑시즘, 실존주의, 정신 분석, 평화주의 등 우리 시대의 특징적 흐름들 중 어떤 것이 가장 참된 것인지에 대한 직관적 이해와 심지어 그에 대한 동정심을 가져야한다고 기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관상가에게 심각한 유혹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관상가라면 그의 관상은 개념적 학설에 빠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관상가라면’ 라는 말은 “그가 모든 복잡성과 이런 지적인 열기와 유행의 과시 보다는 그 단순성을 선호하는 영성 생활의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이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능동적 관상으로 사람은 고독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더욱 더 외적 지지에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그의 정신은 기분전환, 오락, 대화나 일 등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한 수동적 의존이 아니라 그 자신의 건설적 활동에 의해 안정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고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묵상 중에 하느님의 눈 앞에서 발견된 자신의 내적 진리에 따라 그것을 지배하는 영적 창조로부터 내적 만족을 끌어냅니다. 그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주는 것에서 힘을 끌어냅니다. 그는 (감상적이거나 관능적 탐미로써의 사랑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심오하고 자기 헌신적 표현으로써의) 사랑의 창조적 에너지 속에서 생명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능동적 관상은 묵상과 독서와 성교회의 성찬례와 전례 생활에 의해 자양분을 얻습니다. 그러나 독서와 묵상과 전례는 관상이 되기 전에 실체에 대한 일체화되고 직관적인 시각에로 녹아들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독서를 할 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옮겨 다니고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며, (우리가 독서를 잘했다면) 스스로의 생각을 덧붙이게 됩니다. 이것은 추론적인 행위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묵상)을 따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고를 넘어서고 실제 직관적으로 경험된 진리의 신비로 녹아들기 위해서 저자의 생각까지도 버릴 때 독서는 추론이 아니라 관상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인 정신으로 묵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 존재로 관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체에 대한 관상적 직관은 가치 있는 지각(지성적이거나 사색적이지 않고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지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단지 관찰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특별한 것입니다. 그것은 실체의 경험론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개인적 이해입니다.

그런 개인적 직관은 매우 모순되어 보이고 심지어 때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경험적 인식은 매우 강하지만 이 인식을 지지해주는 어떤 추론가능한 지성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확실성과 우연성의 독특한 결합이 유래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아는지 알지도 못하고 “압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환상과 광명주의(역자 주:계시를 받았다고 자칭하는 비밀결사, 신비 교파)로 빠질 수 있습니다. 관상가의 유일한 보호막은 겸손과 무사 무욕과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든지 경험을 촉진하려는 모든 열망에 대한 포기입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사람은 겸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도 추론하지 않고 다른 경험들과 비교도 하지 않으며 그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느님의 면전으로 나아갑니다.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면 관상적 경험은 그에 어울리는 효과를 가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동료들을 사랑하려는 꾸밈없는 열의를 증가시킵니다. 그것이 “목적”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관상은 그 외부의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상은 사랑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사랑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관상의 본질인 사랑이 그 근원이며 “목적”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성으로 볼 수 있는 진리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경탄 속에서 저절로 이끌어 냅니다. 사고의 작용이 사랑과 종교적 경이의 직관에 이를 때 우리는 “능동적 관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관상의 종교적 요소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비종교적이고 추상적 진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만족인 심미적 명상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교적 경외감이 지성적 미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종교적 의미에서의 관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그 말의 한계와 결함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명상”이라는 말은 너무 어슴푸레하고 모호하고 비활동적이어서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종교적 경험의 완전한 영적 힘을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그 단어를 계속 사용하려면 우리는 그 완전히 이교도적이고 지성적으로 함축된 의미를 잊어버리고 그 의미를 견고히 해서 오히려 하느님께서 호렙 산의 불타는 떨기나무 밖에 있는 모세에게 그가 거룩한 땅 위에 서 있다고 경고하셨을 때 그가 “신을 벗어야만 했던” 그 떨림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교적 배경에서 관상은 필연적으로 거룩한 경외심인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합니다.


전례


능동적 관상은 단지 추상적인 영적 진리를 인식하거나 향유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적 신비의 구체적인 계시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교회의 공동 체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전례는 능동적 관상의 일반적인 중심점이 됩니다. 거룩한 전례에는 물론 상징적 예식, 음악, 말, 시, 공동 기도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례를 통해 관상으로 가는 것은 단지 종교 음악회나 매우 근본적인 형태의 종교 영화를 미적으로 즐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두 가지 면에서 관상적입니다. 즉, 말로 된 계시라는 면과 전례적 신비나 거룩한 행위라는 면입니다. 말로 된 계시의 수준에서 우리는 성가를 부르거나 적어도 도덕적 진리와 금욕적 권고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구원의 신비인 복음의 공식적 선포(케리그마-kerygma)가 담겨 있는 거룩한 책들을 읽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기 위해 일어설 때, 우리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장엄하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에 의해 우리는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의 본질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고1) 초자연적이고 변형적인 힘으로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써의 거룩한 생활을 일깨우고 쇄신시키는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세심하고 성실한 우리 신앙의 결과인 이 내적 실체를 깨닫고 우리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전례가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능동적 관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계재일(四季齋日-Ember days)과 같은 특정한 축일의 전례 시기는 공적인 계시와 사적인 관상 사이의 이러한 상호 관계를 일깨워줍니다. 특정한 성서 본문의 끝에 부제는 Flectamus genus(무릎을 꿇읍시다)를 노래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모든 이들이 바로 전에 들었던 가사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게 되는 몇 분간의 침묵 기도에 뒤이어 나옵니다. 불행히도 이 관습은 오래 전에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고 단지 전례적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더 높은 단계의 전례적 관상은 거룩한 행위, 즉 전례적 성사이며 모든 위대한 신비를 능가하는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있습니다. 이 전례와 하느님의 선물은 상징 이상입니다. 그 전례와 하느님의 선물은 그 상징이 설명하는 바로 그 실체를 품고 있으며 그 내적 의미를 깨닫는 마음의 눈을 밝게 열어주는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실로 고대 시대에 세례성사는 “광명”(photismos)으로 알려졌고 그리스도교로의 입문인 이 세례성사는 신앙뿐만이 아니라 관상 속에서 신앙의 완전함을 맛볼 수 있는 힘도 준다고 여전히 설득력 있게 말합니다.

교회는 지원자의 마음을 밝게 비추고 그의 가장 은밀한 마음에서 모든 맹목을 몰아내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지원자가 하느님의 계율을 듣고 하느님의 광채를 보고 그리스도의 달콤한 향기를 맡고 생명의 말을 말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도록 지원자의 모든 감각들은 성유(聖油)로 성별됩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전 존재는 거룩한 성삼의 이름으로 성별되고 영적 감각은 성사의 은총으로 지원자의 안에서 깨어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사람”으로써 우리의 가장 은밀한 자아를 생명으로 이끌면서 성별합니다. 성 토마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때 사람은 세상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맡긴 사람들 안에서 완전히 신비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능력인 성령 칠은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써의 고귀하고 숭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출발일 뿐입니다. 성사들을 위대하게 만들고 다른 모든 성사를 완전하게 하는 성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과 성사적으로 일치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인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성변화된 성체 안에 계신 구세주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신자는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확인합니다. 신자는 거룩하신 구세주와 한 마음, 한 정신, 한 영혼이 됩니다. 신자는 성배에 담긴 포도주 속에서 자취를 감춘 물방울과 같이 신비로운 그리스도께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에 의해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신비적 일치를 상징하고 그 일치를 이룹니다. 관상의 은총은 신자들이 이 신비의 완전한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게 해주며 그 신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깨닫게 해 줍니다. 관상은 성 바오로가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에페소 1:18)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부른 위대한 선물에 비하면 미약한 말일 뿐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사람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에페소 1:18, 3:19)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위대한 신비에 대한 성교회의 “관상”으로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정신적이고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의 관상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 존재, 육신, 영혼, 정신, 의지, 상상과 감정을 포함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배는 사람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완전히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리하여 관상은 예배의 완성이 됩니다. 관상이 없다면 예배는 생명이 없고 외적인 채로 남아 있기 쉽습니다. 성교회의 전례 생활만이 능동적 관상으로의 부름입니다. 전례로부터 물러나와 그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은 성교회만이 그 자녀들에게 특권적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수많은 은총과 빛으로 성교회가 모두에게 제공하는 능동적 관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숭고한 교리 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 거룩한 성사는 관상의 징표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관상의 시작이시며 끝이신 분을 품고 있습니다. 주부적(注賦的) 기도로 들어가는 가장 평범한 방법 중의 하나가 거룩한 성체성사에서 주어지는 은총을 통해서라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활동에서 하느님과의 일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결코 완전한 관상가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인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 깊은 내적 생활과 모든 주부적 기도의 은총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그 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분명히 나타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활동 생활에서 매우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완전한 자기희생으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명 때문에 정신을 피조물에서 완전히 비우고 하느님께만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고독이나 침묵이나 휴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그분의 자녀들 속에서 그분을 섬기느라 너무 바쁩니다. 동시에 그들의 정신과 기질은 완전한 관상 생활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평화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식물처럼 생활하고 그들의 내적 생명은 잘 자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루 종일 그분의 현존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기희생적 노동을 통해 그분께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하느님을 찾는 방법을 압니다. 그들은 그분의 일터에서 살고 일합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그들 안에 계심을 깨닫고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깊고 평화로운 기쁨을 맛봅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구송기도와 정감적(情感的) 기도의 수준을 넘어 설 필요가 없는 매우 단순한 생활을 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해도 극도로 단순한 그들의 기도는 너무나 깊고 내적이어서 그들을 관상의 문지방을 넘어서게 이끕니다. 그들은 결코 관상 생활에 깊이 들어가지 않지만 관상과 같은 은총에 낯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활동적인 노동자라고 해도 순명과 형제적 사랑과 자기희생과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나 견뎌내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의탁함으로 그들 안에 보존되는 마음이 매우 순수하기 때문에 그들은 숨은 관상가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과 가까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감취진” 관상을 영위합니다.

완덕으로부터 결코 제외되지 않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외관상 더 깊은 내적 생활의 혜택을 받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경지의 거룩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숨은 관상가와 단지 외적이고 형식적 일상에 지나지 않는 신앙심을 가진 표면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만을 위해서 살며 그분에 관한 것을 알지 못할 수가 없다는 차이입니다.

“숨은” 관상이 나름대로 장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상이란 비밀스럽게 숨어계신 하느님과의 친교이기 때문에 숨겨져 있을수록 더 순수한 것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음과 성실은 영성 생활에서 서로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숨은 관상” 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숨어 있다는 것은 물론 관상가 자신도 모르게 숨어 있는 관상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더 이상 탐구되거나 추구되거나 요구되지 않을 때, 그 관상의 은총이 가장 안정되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신비스럽고도 깊은 진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관상은 있는 그대로 알려질 때 가장 순수합니다. 물론, 관상이 되려면 그것에 대한 어떤 자각이 있어야만 합니다. 전혀 어떤 자각도 없다면 관상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하고 있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자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무지”인 일종의 부정적 자각입니다. 위 디오니시우스2)(Pseudo-Dionysius)의 고전적 표현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함”에 의해 알게 됩니다. 사람은 사고를 넘어선 어둠 속에서 “비교감적”으로 그분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사람은 관상을 할 수 있는 소위 “망각”에 의해 관상합니다. 자신이 관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 (관상이라는) 선물은 못쓰게 됩니다. 사막의 성 안토니오3)(St. Anthony of the Desert)는 이미 오래 전에 그것을 간파하고 “그 기도는 수도승이 더 이상 자신도 인식하지 않고, 그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때 가장 순수하다.”고 말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성 안토니오의 이 말이 일종의 신비로운 수면 상태인, 기묘한 정신적 열중의 상태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그것은 모든 특별한 정신적 상태를 뛰어 넘어 결국 “어떤 상태”도 아닌 영적 해방과 자유인 무욕의 인식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관상가가 되려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그 정신이 가려지게 되는 일종의 무겁고 타성적인 마비에 대해 경계를 단단히 해야만 합니다. 그 자신의 어둠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누구도 그의 정신 작용을 “멈추게” 해서도 안 되고 그의 무의미에 집중한 채 있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희망과 신앙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무의미에서 나와 하느님 안에서 해방을 찾아야만 합니다.

숨은 관상가는 순수한 목적으로 인해 이 세상의 관심사에서 해방됩니다. 그는 더 이상 활동이나 기도에서 자신을 찾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의탁하고 현재의 실체와 부단히 접촉하려고 하면서 일종의 거룩한 무관심을 성취해 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실체가 아니고 허상일 뿐인 표면적 감정과 흥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내적이며 영적인 실체를 의미합니다.

활동 중에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관상 생활은 매우 단순하고 내적으로 해방된 생활입니다. 사람은 특별한 것을 찾지도 않고 특별한 만족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에 만족합니다. 그는 해야 할 것을 하고 그것이 더 구체적일수록 더 좋습니다. 그는 행해진 것의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좋은 동기를 가졌음에 만족하고 실수하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살아있는 생명의 강에서 헤엄치며 현재 하고 있는 분명한 직무의 비밀과 평범 속에서 하느님과 접촉하는 매 순간에 머무릅니다.

거리를 걷고, 마루를 훔치고, 설거지를 하고, 콩을 심고, 책을 읽고, 숲에서 산책을 할 때 그 모든 것은 관상으로 가치 있게 되며 하느님 현존에 대한 분명치 않은 느낌으로 가치 있게 됩니다. 이 관상은 거기에 있다 해도 그가 찾으려고 “하지” 않을 때 더욱 더 순수합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은 기도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 가장 단순하고 안정되고 안전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결코 누구의 관심도, 그렇게 사는 그의 관심조차도 끌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에게서 어떤 특별한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자유에 대한 대가(代價)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관상적 상태”를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상과 같은 은총”을 즐긴다고 위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신비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신비적인 생활은 이런 상황에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영혼에게 주어진 신비스러운 은총은 활동적인 특징을 가지겠지만 그 표면 밑에는 강한 관상적인 직관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가 활동에 몰두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그 목적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한 이것은 순수하고 생생하게 유지될 것입니다. 능동적 관상이건 수동적 관상이건 마음의 순수함은 언제나 관상적 진리의 보호자입니다.


습득된 관상과 주입된 관상


지금까지 우리는 관상을 “습득된” 것과 “주입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왔습니다. 이 구분의 정당성에 대한 주장은 신학자들의 뜨거운 논쟁거리였고, 지금은 이미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린 그 논쟁의 작은 불씨를 지피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20세기에 이삼십년간 거의 효과도 없이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 논쟁자들은 신비적 기도의 현상학4)적 한계를(언제 “자연적”이고 “습득된” 기도가 멈추고 “초자연적”이고 “주부적”인 기도가 되는지) 정의하려고 했습니다. 즉, 언제 사람이 근원적 원인이 되기를 멈추고 하느님의 성령께 이 자리를 내어 드립니까? 기도가 어떤 시점에서 진정으로 “신비적”인 것이 되는 표징을 보여줍니까?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영감을 받은 일관된 노력에 의해서 자신을 순수한 관상에 대해 준비시키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런 질문들은 이내 복잡해지게 되고 전체적인 시야로 보면 오히려 하찮은 말장난처럼 보입니다. 특히 모든 것은 사람들이 “관상”과 “신비적”이라고 규정했던 방법에 의존했습니다. 관상을 “자연적 (관상)”과 “초자연적 (관상)”으로 구분하는 사람들은 (자연적) 관상은 습득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자연적이고 습득된 관상은 이 책에서 능동적 관상이라고 설명했던 것으로써 관상가 자신의 준비된 영적 노력 후에 도달되는, 감각기관과는 무관한 실체에 대한 직관적 지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습득된 관상의 옹호론자들은 이 관상은 진실로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똑같은 기도 상태에 대해 분명히 말하면서 그것은 참되고 신비적인 관상이지만 습득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수동적이며 초자연적 선물입니다.


자연적 관상과 신비 신학


이 부분에서, 나는 이제는 죽어버린 이 복잡한 논쟁거리를 무시하고 우리가 어느 정도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 준비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인 하느님에 대한 (감각기관과는 무관한) 직관의 실체에 대해 말해야겠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그리스 교부들이 만든 자연적 관상(theoria physike)과 신학(theologia), 혹은 하느님에 대한 관상 사이의 구분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자연적 관상(theoria physike)은 자연이나 계시의 상징 속에 있는 하느님을 반영하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적인 것에 대해 직관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욕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켜서 외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애착에서 야기된 환상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오랜 금욕적 준비에 의한 마음의 완전한 정화를 전제로 합니다. 그 시각이 깨끗하고 “순수”하다면 (즉, “한 가지 의도”만 가진 사심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 있는 관상가의 사고는 더 이상 욕정적이지 않고 왜곡되지 않습니다. 그의 사고는 단순하고 올바릅니다. 그는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알아차립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본성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신비스러운 은총입니다.

이런 종류의 관상과 관련된 “자연적”이란 단어는 그 원천이 아니라 그 대상을 의미합니다. 자연적 관상(theoria physike)은 우리의 타고난 능력으로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계신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 관상”은 신비적입니다. 즉,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상가의 노고와 준비를 요구합니다. 관상가는 자신을 살펴보아야만 하고 창조된 세상과 그 세상에 가득 넘치는 상징들을 보아야만 합니다. 관상가는 성서와 전례의 상징적인 말 속에서 그의 내적 생명을 변모시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스 교부들에 따르면 자연적 관상은 창조된 자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들을 “보고” 벗 삼아 지내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 자연적 관상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준비하며 찾는 관상이지만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 신비적 직관 속에서 완성되는 관상인 내가 “능동적 관상”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의 원형입니다.

위 데니스(Pseudo Denis) [위 디오니시우스]의 언어로 신학(theologia) 혹은 “신비 신학”이라고 하는 순수한 관상은 모든 사고를 넘어서, 즉 관념이라는 매개체 없이 하느님과 직접적인 접촉과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이것은 정욕과 감정과 상상력으로 채색된 관념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영혼 사이에 어떤 매개체를 요구하는 단순한 지성적 직관까지도 배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학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입니다. 그리스 교부들에 따르면 이 궁극적인 그리스도교 관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가장 높은 신비인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 안에 계시는, 즉 한 본성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준 경험적 지식입니다.

그 궁극적인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적 노력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지성적 문제가 아니고 배움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에 의한 일치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영혼이 하느님과 닮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이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 I :7-8, 13-14)


외견상 단순해 보이는 이 사도의 편지는 신학적 심오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상적 사랑 안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신 하느님의 바로 그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대한 완전한 정당성을 줍니다. 완전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같이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세 위격, 사랑의 근원이시고 수여자이신 성부와 사랑의 형상이며 눈부신 영광이신 성자와 사랑하고 계신 성부와 성자의 친교이신 성령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신학에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무지의 어둠 속에서의 하느님과의 접촉입니다. 필연적인 결과로 그것은 상징과 지성의 직관을 뛰어 넘고 어떤 피조물의 형상이라는 매개체도 없이 직접 하느님께 이르게 됩니다. 만약 매개체가 있다면 그것은 지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 속에 있는 형상이나 관념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매우 닮게 하고 그분께 순응하게 해서 마치 그분께서 우리의 자아인 듯이 우리의 가장 은밀한 자아 속에서 그리고 그 자아를 통해 우리가 신비적으로 그분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사랑에 의해 되살려진 우리의 전 존재에 대한 섭리입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고양되고 변모되고, 성부와 일치된 신비가의 내적 자아는 이제 객관적 형상이라는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하느님화 된 주체성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말로 옮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말해 줄 수 있는 스승들의 책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의미에서 모세가 시나이 산을 올라 어두운 구름 속에서 하느님과 직면했던 것이 상징하는 바를 잘 설명했던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5)(St. Gregory of Nyssa)가 있습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산에 절대로 발을 들여 놓지 않아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한 발짝이라도 들여 놓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오는 이것이 열정적이거나 심지어 단순한 관념조차도 관상의 산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합니다. 영혼은 결코 어떤 관념도 없이 어둠 속에서 산길을 올라야만 합니다.


앞으로 진보하는 영혼이 더 열심히 더 완전히 노력함으로써 이 실체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더 이해하게 될수록, 그리고 관상에 더욱 더 가까이 갈수록 하느님의 본성은 볼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것들뿐만이 아니라 지성으로 이해해서 믿은 것까지 그 모든 인식된 것을 뒤에 남겨두고 영혼은 엄청난 싸움을 하면서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분을 알게 될 때까지 안으로 안으로 계속 들어가고 거기에서 영혼은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삶. 2권 162. Sources Chretiennes)


하느님에 대한 이런 “통찰력”은 어둠 속의 통찰력이며 천국에서 성인들이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즐거워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지도 보이지도 않게 일어난다는 확실한 차이가 있지만 하느님과의 똑같이 참되고 순수한 접촉입니다. 사실, 그 영혼은 하느님은 영혼에게 전혀 안 보이신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하느님을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놀랍고 깊고 완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영혼은 관념적 묵상의 모든 흔적을 그 자신으로부터 남김없이 멀리 떨쳐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자리 잡은 영적 장애물들이 치워집니다. 사고와 자연의 빛과 심상은 영혼이 하느님이라는 존재와 접촉하게 하는 직접적이고 꾸밈없는 감수성을 방해하는 소위 장막이거나 가리개입니다. 그 장막이 제거될 때, 사람은 신비로운 어둠 속에 계신 하느님과 접촉할 수 있습니다. 직관은 자신을 희생하고 하느님의 초월적 현존에 내어 맡기는 무아경, 즉 그 자신을 뛰어넘는 마지막 도약에 의해 그분께 다다릅니다. 이 “무지”의 마지막 무아경의 행위의 주체인 우리의 영혼과 객관적 대상으로써의 하느님 사이의 간격은 마침내 메워지고 우리는 신비적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와 그분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순수한 의미로 말할 수 있는 주부적 혹은 신비적 관상입니다.











[제 6 장]


주부적 관상



다른 차원의 관상적 경험에 대한 산만하고 다소간 혼란스러운 설명을 하면서, 모든 형태의 순수한 관상에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노력과 관련이 있건 없건, 그것은 감각을 넘어서고 심지어 관념조차 넘어서는 하느님과 명확하지 않고 경험적으로 접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들로부터 해방되면 될수록 그 만큼 더 관상은 순수해집니다. 더 낮고 초보적인 신비적 직관은 물질세계의 상징을 통해 알게 되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더 높고 완전한 관상은 감각적 형상과 추론적 이해를 넘어서서 “무지”의 구름 속에서 번쩍입니다.

아마도 이 주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교부 문서는 아레오파고스의 재판관 위 데니스의 [위 디오니시우스] 신비 신학의 서문일 것입니다.


모든 실체와 모든 지식을 넘어서는 그분과의 일치에 이르기까지 무지 속에서 가능한 한 네 자신을 들어 올려라.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네 자신을 해방시키고 난 후에 하느님적 어둠의 순수하고 초자연적인 빛에 이르기까지 네 자신을 들어올린다는 것은 저항할 수 없는 도약과 자유와 순수로 네 자신과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지식이 정지됨으로써 모든 것을 능가하시는 그분께 완전히 속하게 되며 더 이상 자기 자신이나 다른 어떤 존재에도 속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전혀 알 수 없는 그 분과의 가장 고귀한 일치 속에서 결합하기 때문에 (관상가는) 모든 객관적 대상들, 관상의 바로 그 수단들로부터 해방되어 진실로 그가 모든 지식의 객관적 대상에 대해 눈을 감고 완전히 불가해하고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찾게 되는 그 신비스러운 무지의 구름으로 스며든다. 이런 완전한 무지 속에서 그는 이제 이해력을 넘어서는 지혜로 알게 된다. (영성 사전 Dictionnaire de Spiritualite, 2권, 1899)


위 데니스는 이 부분에서 무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관상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강조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에 수반되는 모든 신비적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개념에 대해서도 강조했습니다. 무지의 어둠 속에서 관상가는 하느님적 지혜와 수동적인 접촉을 하게 됩니다(Patitur divina)1).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관상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이런 수동성이며, 하느님의 가장 신비스럽고 접근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인 하느님의 ‘어둠 속의 빛’을 받아들임입니다.


우리는 이제 신비적 관상의 본질적 요소를 정리해 보아야겠습니다.


1. 그것은 낮은 차원에서는 감각을 초월하는 직관입니다. 높은 차원에서 그것은 지성 자체를 초월합니다.


2. 그러므로 그것은 어둠 속의 빛, 무지 속의 앎이라는 속성에 의해 특징 지워집니다. 그것은 감정과 개념까지도 넘어섭니다.


3. 어둠 속에서 이렇게 하느님과 접촉하면서 양쪽에는 어떤 특별한 사랑의 행위가 있습니다. 영혼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물러나야만 하고 감각적 실체에 달라붙어 있는 모든 강한 감정과 열정에서 비롯된 정신과 상상에서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열정적 사고”는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면서 우리의 지성적 시각을 왜곡시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지성 그 자체도 넘어서 가야만 하고 “단순한 (직관적) 사고들”에 조차도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관상에서는 모든 사고가 (얼마나 순수하던 간에) 초월됩니다. 관상가는 방심하지 않아야만 하고 감각적 애착이나 심지어 영적 애착으로부터도 이탈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관상가는 무지의 구름 속에 머물기 위해서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에 대한 초자연적 환시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외면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여하튼, 관상은 금욕적 극기에 대한 엄청난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관상가가 모든 것을 “넘어서 가는” 그 궁극적으로 황홀한 움직임은 수동적인 것이며 자신의 통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4. 관상은 사랑의 작용이고 관상가는 무와 초연함과 “밤” 속에 계신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 가장 영적인 것조차도 이탈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관상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하느님의 자유롭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분 홀로 신비적 은총의 선물을 주실 수 있고, 영혼의 깊은 곳에서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비밀스럽고 형언할 수 없는 접촉에 의해 그분 자신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영혼의 사랑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5. 무지 속에서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은 지성적인 것이 아니고 엄밀히 말해 정서적인 것조차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능력의 작용이 아니며 영혼을 그 외부에 있는 객관적 대상과 결합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적 결합의 작용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그분을 압니다. 우리는 그 분의 무한한 자비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분을 이해합니다.


6. 관상은 영혼이 그분과의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접촉을 하게 해주면서 그분에 의해 영혼의 정점에 주입된 단순하면서 알아차리기 힘든 하느님에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며 지혜입니다. 신비적 관상은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하느님에 대한 직관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모든 본성적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혼이 얼마나 깨끗하고 그분 이외의 것들에 대한 모든 애착을 얼마나 버렸나에 따라 그것을 주십니다. 달리말해,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분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도 역시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분께서 이미 우리를 찾아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찾습니다. Ipse prior dilexit nos.2)

그러나 관상은 그 자체가 순수한 사랑의 발전이며 완성이라는 점을 반드시 강조해야만 합니다. 가장 커다란 기쁨, 지복의 완성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느님만을 위해서 (또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관상이란 하느님이 무한한 사랑이시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완전히 그분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 그리하여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성적 경험입니다.


7. 성 베르나르도3)는 사랑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그 자신의 목적이고 그 자신의 가치이고 그 자신의 상급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그 자신을 넘어선 어떤 이유도 찾지 않고 그 자신 밖에서 어떤 성과도 찾지 않습니다. 사랑의 바로 그 행위가 사랑의 가장 커다란 상급입니다. 순수하고 사심이 없는 사랑으로 모든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이며 모든 상급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Amor praeter se non requirit causam, non fructum: fructus ejus, usus ejus.4) 그는 선언하기를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Amo Quia amo, amo it amem (아가서에 대한 강론 83)


8. 관상 기도의 경험과 우리가 경험해 나가는 관상의 연속된 단계들은 모두 하느님의 안내 아래 영혼이 수동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사실에 제한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끌렸다는 그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깊은 경험적 확신에는 특별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무력하고 버림받았다는 그 격렬한 느낌에는 특별한 고통도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더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상한 무력감과 쓰라림과 심지어 뚜렷한 절망감의 시기를 지나가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목적을 정화시키고 자기 분석을 그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상황 밖에 있을 때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포기와 쓰라림의 “깊이”는 정확한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는 것은 병적인 것이 되어 우울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믿음과 인내와 순명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나아가는데 틀림없이 도움이 될 안내자입니다. 관상적 평온함의 위로에 관해 너무 열심히 숙고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애적 만족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그것은 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활동 아래 완전히 수동적이라고 가정해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때조차도 고집스럽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숙고는 은총의 작용을 방해하는 일종의 활동일 뿐입니다. 수동적 관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비춰주시는 그 “어둠의 빛”은 이런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영적 야망과 우리 자신의 “상태”에 무관심하게 해줍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빛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움직이게 하고 수많은 호기심어린 자기 진단을 중단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점차 그칠 것이고 쓸데없는 문제들을 잊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무심함과 신뢰는 어떤 설명이나 계획도 이해할 수 없는 침묵하는 현재에 계신 하느님께 모든 결정을 내어드리는 신비적 은총이며, 변호자이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에카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의 신비적 사랑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9. 관상은 영혼에 직접 작용을 하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혼들은 원죄에 의해 피조물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애착으로 시력이 약해지고 눈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태양 빛이 병든 눈을 아프게 하듯이 하느님의 빛은 영혼을 아프게 합니다. 하느님의 빛은 고통을 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순수합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더럽혀지고 병들고 약해진 영혼은 하느님의 그 순수함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런 영혼은 하느님의 빛 때문에 생긴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자기애를 추켜세우고 자연적인 지식에서 비롯된 하느님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생각들과 반대되는 분입니다. 그분의 빛은 영혼이 독자적으로 형성한 그분과 관계된 모든 자연스러운 생각을 뒤로 던져버리고 헛되게 합니다. 주부적 관상 안에서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면 영혼이 그분에 관해 상상했던 모든 것은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 됩니다. 그 분의 주입된 사랑의 불은 초심자에게는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의 커다란 은총이라고 착각하는 그런 빛과 느낌들과 인간적 위로에 애착을 가진 영혼의 자기애를 무자비하게 공격합니다.


10. 그러면 주부적 관상은 조만간 끔찍한 내적 격변을 가져올 것입니다. 기도의 달콤함은 사라질 것입니다. 묵상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전례 예식이 견딜 수 없는 짐처럼 느껴집니다. 생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할 의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내적 자아는 어둠과 메마름과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고 순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벌로 모든 영성 생활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유혹이 영혼에 들이 닥칩니다. 이때가 기도 생활에서 어려운 때입니다. 이때에는 하느님께서 관상으로 부르신 영혼이 이 “귀에 거슬리는 말”에 마음이 상해 되돌아가고 “더 이상 그분을 따라 다니지 않게”(요한 6:61-67)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의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빛의 강렬함에 눈이 멀어 그것이 어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것에 반항합니다. 그들은 믿으려하지 않고 어둠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맹목적 신앙으로 공(空) 속에서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신과 의지와 판단과 결정을 신뢰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내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채지 못하는” 감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이 어둠과 무력함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분의 십자가를 주셨고 그것은 치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보통 하느님께 충실합니다. 그들은 그분께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을 외면하고 외적인 봉사만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경건한 행위로 자신을 외면화시키고 그들에게 완전히 관상의 좌절처럼 보이는 것에서 경험했던 고통과 패배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일에 열중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는데 그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 못합니다.”(요한 1장)


11. 이런 개인적 시험은 제도적인 상황에 의해 증대됩니다. 완전히 내적인 영감에 대한 근거 없는 충실함으로부터 그를 뒤로 물러나게 하는 고뇌와 고통은 그 자신의 규범의 충돌로부터 튀어나옵니다. 관상의 어둠으로 부름 받을 때, 우리는 친숙하고 인습적인 사고와 행동 양식을 버리고 성령의 보이지 않는 빛인 새롭고 숨겨진 규범에 따라 판단하도록 불림 받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마가 아닌 하느님께 인도받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은총과 환영(幻影)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 충돌은 아주 미묘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개인적 영감에 의해 관상가들을 이끄시기 (적어도 이 내적 기도의 문제에서) 때문에 관상으로의 부르심은 내적 생활의 평범한 일상적 방법에서 벗어나고 신앙 서적이나 교본의 규범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인 영감이라는 다른 규범으로 살게 되거나 (혹은 적어도 기도하는) 직접적인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인도 아래 있지 않으며 동시에 다소간 정형화된 사회의 일원으로써 객관적인 삶의 규범을 따라 살아갑니다. 동시에 성령의 영감은 때때로 종교 사회의 합리적 전통 규범들과 완전히 상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전들은 하느님께 직접 인도받은 사람들이 전문적인 종교인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을 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크의 성 요한(St. John of Arc)에 대한 재판이 그 적절한 예입니다. 관상가들의 삶은 그가 은총의 내적 운동이라고 느끼는 것과 사회가 그에게 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객관적이고 외적인 요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대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짓 신비주의자들은 개인적 영감에 기초해서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항상 이탈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긴장은 더욱 높아집니다. 가장 유기적으로 연관이 있는 구성원들을 통해 말하는 사회에서는 그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관상가가 하느님에 대한 영감이라고 믿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따르는 것이 분명히 금지되지 않은 곳에서 조차도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으로 용인된 이상과 완전히 부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의 영적 훈련은 그에게는 지루하고 시간낭비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그들의 설교와 대화는 의미 없는 말과 같은 공허감으로 그를 피곤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노래하는 성무일도, 전례 예식과 성가에 대한 그들의 들썩거림은 정형화된 기도와 외적 예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적 만나의 섬세한 맛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것입니다. 그가 홀로 조용히 하느님께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말씀하시는 무와 어둠과 공허함 속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빛과 꽃다발이 그의 정신에 강요되고 그는 생각하고 말해야만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도 느끼기를 원하는 ‘찬미가’를 노래해야만 합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거칠고 더럽게 느껴지는 단맛에 대해 입맛을 다시려고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단맛이 의미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간접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근동 지방에는 축제 때에 주인이 손님에게 자기 입에 넣고 씹었던 음식을 주는 것이 존경을 의미하는 풍습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상가에게 기도에 헌신하는 공동체 속에서 사는 것은 이런 종류의 연회에 하루 종일 참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다른 누군가가 먼저 씹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것을 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죄의식을 느낍니다.

만약 수도 단체들이 최근 여러 세기동안 그렇게 경직되고 정형화되지 않았다면, 만약 그들이 광범위한 고대 전통의 건강함과의 접촉을 그렇게까지 대부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이 고통스러운 대립은 더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것도 조직화만큼 관상생활에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규칙들은 확실히 필요하고 수도 규칙을 따르는 생활이 반드시 조직화된 삶일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모든 건전한 규칙들은 현명하게도 예외적인 개인적 사정을 예견하고, 수도승이 건강이나 직무나 내적 생활 때문에라도 더 개인적인 상황이라는 특혜를 요구할 때 그 결정을 장상에게 맡겨둡니다. 예를 들어, 수도승들이 남은 세월을 더 완전하게 명상과 고독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이 동양의 수도 생활에서는 항상 잘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은수자나 은둔자로 혼자 살아가거나 (오늘날도 아토스 산의 수많은 동굴 은수자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공동생활(cenobium)을 하면서도 오랜 시간 혼자 기도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발전의 어떤 단계를 지난 후에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쥐고 당신께 어울리게 변화시키실 것을 예견한다면, 어느 정도의 자유가 그분의 행동에 맡겨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고한 불복종과 완악한 아집은 그 사람이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명백한 표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서양의 현대 사조는 “하느님의 뜻”과 “성령의 작용”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규범과 동일시하고 개인에게 특별한 은총이 꽃피울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대립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외적인 것이 항상 이깁니다. 게다가 우리는 항상 집단적 생각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이 매우 가치 있는 희생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근시안적인 생각이 종교적 삶을 이런 식으로 획일화된 제도로 만들어 잠재적인 성인들과 관상가들이 비난받고 무력하게 되어 괴물처럼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많은 관상 수도원에 진정한 관상가들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종종 인격적이며 내적으로 섬세한 사람들이 수도원의 이런 환경에 억눌려 그 안에서 몇 달간을 보내고 나서 커다란 실망감을 안고 내적 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떠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구속적이고 완고한 제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고뇌나 절망에 굴복하지 말아야 하고 쓸데없이 저항하려는 행동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단정은 우리 자신의 내적 열망에 치명적입니다. 현명한 지도자를 발견하(고 그를 따르)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이 하느님의 은총을 고려해야만 하고, 비록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각과 맞지 않다 하더라도 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기행과 아집과 헛된 과시를 피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다면 은총이 이것을 보살필 것입니다. 은총의 표징은 외적 단순함과 드러나지 않음이기 때문입니다. 유순함과 순명도 그렇습니다. 순명과의 충돌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양보하고 순명하는 사람이 절대로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항상 은총 속에서 성장할 것이고 희생했다고 해서 좌절감을 맛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만하게 불순명하는 자는 하느님의 은총을 잃을 것입니다.




[제 7 장]


관상 기도에 대한 5개의 텍스트



능동적 관상은 알아차리기에 아주 특별한 어려움이 없지만, 수동적이거나 주부적 관상은 적어도 그 초기 단계에서는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무지”(혹은 객관적 대상으로써의 하느님에 대한 개념적 지식의 부족)와 상대적 무력감이나 영적 능력을 “잡아 묶음”이라는 수동성의 요소는 우리를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어떤 느낌이나 활동도 없는 어느 정도 완전한 무력함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단지 공(空)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다른 표징이 없을까요? 그러나 이 문제는 사실상 너무 추상적이어서 현실적 실체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로 정형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관상적 경험에 대한 본질적이거나 직접적 지식이 결여된, 학자들을 즐겁게 하는 일종의 수학 방정식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객관적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사고를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관상적 직관이 결코 완전히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은 참입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방법은 정말로 억제된 것인 반면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나-너 관계 속에는 비록 보잘 것 없지만 하느님에 대한 긍정적 인식도 있습니다.

이런 모순처럼 보이는 인식할 수 없는 “지식”은 매우 불완전한 관점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것은 명쾌함과 지성적 세심함이 결여되었습니다. 논리적 체계화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고와 논리를 넘어섭니다. 이 역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어떻게 아는지 알길 없이 그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어떤 의심을 허용할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논리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고의 수준에서는 의심이 허용될 것입니다. 사실, 의심 이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과는 너무나 동떨어져서 비이성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수준에서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 다른 수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경험이 모호함 없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는 직접적 직관의 수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처럼 실체를 “경험”하는 수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그 명백한 사실을 증명합니다. 관상적 경험은 어떤 단계적 발전을 통해 도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보거나” 혹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여러분에게 나타나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몇 텍스트들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신중하고 심사숙고해서 읽어야 합니다.


1. 십자가의 성 요한


우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조용히 쉬기 위해 비밀스러운 내적 영감에 응답해야만 하는 무와 이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부적 관상의 수동성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이 상태에 다가 갈 때 그대는 영적 달콤함이나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묵상에서 그 모든 열망을 떨쳐 버리도록 하라. 지상적인 것은 물론 천상적인 것에 관하여도 그 어떤 염려나 걱정으로 영혼을 불안하게 하지 마라. 될 수 있는 대로 영혼을 전적 이탈과 깊은 고독 가운데 있게 하라. 깊숙이 들어갈수록 영혼은 더 빨리 이 평화로운 고요에 이를 것이며 또한 영으로서는 사랑겹고 고요하고 적막하고 평화롭고 감미로우며 취하게 하는 하느님스런 지혜의 영을 넘치게 받을 것이다. 이때에 영은 이런 효과가 누구에게서 오는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이따금 그리움을 느끼며 고요하고 다정하게 황홀해짐을 느끼는데 이것은 영혼의 작용과는 상관없이 성령께서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산 불꽃 3권 38)


2. 복자 요한 라이스브뤅


이제 15세기 플로망의 위대한 신비가인 복자 요한 라이스브뤅1)(Blessed John van Ruysbroeck)의 글을 봅시다. 관상적 경험에 대한 어렵지만 탁월하고 풍부한 설명입니다.


이 순수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이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그것은 영원하고 그 안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안으로 들어올려질 정도의 그런 순수한 정신에 대해서는 영원히 현재이며 준비를 하고 나타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며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사신다. 이 단순한 일치는 순수한 정신에게로 인도될 때 지성적 눈에는 아주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하느님의 빛으로 번쩍이는 순수하고 맑은 태도이며 우리는 정화되고 밝아진 눈으로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고 마음에 새기고 관상한다. 거기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형태를 취하고 하나의 진리가 되고 하느님의 지혜의 거울에 비춰진 하나의 모습을 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이와 똑같은 단순하고 영적인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고 훈련을 한다면 우리는 관상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영적 사다리의 일곱 계단, 6장 p. 56)


3. 무지의 구름


여기에 그 꾸밈없는 명료함으로 위의 글과 대조되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설명이 있습니다. 바로 관상에 관한 영국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의 하나, 14세기의 무지의 구름2)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대가 내게 “어떻게 하느님을 생각해야 하며, 대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하고 물을 터이나, “나도 모른다.”라는 답변 밖에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런 질문은 내가 그대를 이끌고자 하는 그 어둠, 바로 그 무지의 구름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다른 모든 창조물과 그 창조물의 행위를 온전히 알 수 있고, 또 그들에 관해 생각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까지도 알 수 있지만 하느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을 내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할 것이다.

왜 그렇게 할까? 그분을 족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느님의 자비와 그 진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익할 수 있고 관상의 적절한 부분인 기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놓인 일에 있어서는 그것마저도 끌어내려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매우 용기 있고 단호하고 열정적이며 기쁘게 타오르는 사랑으로 이것들을 짓밟고 올라서서 그대 위에 드리워진 그 어둠을 꿰뚫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간절한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두터운 무지의 구름을 맞추되, 결코 포기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마라. (무지의 구름 6장)


이 감탄할만한 무지의 구름의 본문에는 조금 전에 제기된 분명한 문제들에 대한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관상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하느님을 봅니다. 실제로 그는 아무 것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성은 초월적인 분의 현존을 숨기는 “구름”에 의해 장님과 같이 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숨기는 이런 구름의 이미지는 시나이 산에서의 모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필로 유대우스, 오리게네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모든 고전적 스승들에 의해 이런 특별한 의미로 이해되었습니다.) 관상의 어둠 속에 숨어있는 존재에 대한 아주 분명한 경험이 없을 때조차도,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모든 분명한 지식을 잊어버리고 무시해 버리기를 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간절한 열망의 “날카로운 화살”로 “무지의 구름을 뚫어버리고자” 노력하는 사랑의 적극적이고 끈질긴 움직임이 항상 있습니다. 14세기의 익명의 작가는 성 토머스 아퀴나스나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을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람의 지성으로는 충분히 파악하거나 분명히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사랑에 의해 그분께 직접 도달할 수 있으며 실제로 “사랑으로 그분을 붙들고 차지하는” 관상 속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불확실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그분께 도달하면 우리는 만족합니다. 지식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그분을 압니다.


4. 마이스터 에카르트


라이스브뤅과 같은 시대의 라인랜드에 그와 매우 흡사한 도미니코회 회원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있었습니다. 에카르트는 그 작품의 열 두 부분이 이단으로 선고받았기 때문에 신비주의에 관한 가톨릭 작가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창적인 말로 깊고 미묘하면서 풍부하고 생생한 신비주의를 표현한 다음 내용에는 이단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카르트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역동적인 “중개자”로써 하느님과 만나는 지점인 신비적 불꽃이나 영혼의 중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중개자”는 하느님을 영혼 안에 사시게 하며 영혼을 하느님 안에 살게 하고 궁극적으로 영혼이 모든 사람들 안에 살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죄악으로 인해 그 생명력을 잃어버렸고 그런 영혼에게 하느님은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나인의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루가 7:11 참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 영혼에게 말씀하시며 그 중개자는 다시 생명을 얻어 사랑에 의해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릴” 능력을 회복합니다. 이 “중개자”는 영혼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자아이며, 하느님 안에 있는 영혼의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선한 사람들 속에 계시며,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영혼 안에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에 의해 영혼은 또한 하느님 안에 살게 되지만 그 영혼이 외적인 것에 열중한다면 그 어떤 것은 죽고 따라서 하느님도 죽는다.

성부께서는 이 숭고한 중개자(어떤 것)를 통해 말씀하시고 당신의 독생 성자께 말씀하신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그렇게 하느님은 (그리고 하느님과 영혼의 일치는) 너무나 완전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분은 너무나 높이 계셔서 지성이 결코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개자는 하늘을 넘어, 그렇다! 천사들도 넘어 하느님께 도달한다. … 우리는 멀리, 헤아릴 수 없이 멀리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고 소망하는 모든 것은 여전히 하느님이 아니고, 정신과 소망이 어둠 속에서 죽는 그곳에 하느님께서 빛을 발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이스터 에카르트: 현대 해석)


5.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우리는 거의 같은 가르침을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 계신 하느님에 대한 경험은 아가서에 대한 강론에서 명확하게 언급됩니다.


말씀과 영혼의 이 결합에 육체적 요소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영이시므로 이 결합도 영적인 것이다. 신부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마음 안에 있는 가장 은밀한 영적인 선물에 의해 그분을 받아들이고, 분명한 형태가 아니라 모호하게 주입된 형태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을 느끼면서 그녀가 바라던 그분을 한꺼번에 차지하게 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분의 현존이 비밀스럽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신부는 그만큼 더 기쁘다. 이 말씀은 소리를 내며 오시지 않고 스며들듯이 오시고, 영혼에게 말을 건네시는 것이 아니고 어루만지시며, 귀를 두드리지 않으시고 마음을 건드리신다. 이것이 형태가 없으시지만 영혼에 그 형태를 각인시키며 (육체의) 눈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기쁘게 하는 그분의 얼굴이다. (아가서에 대한 강론 31)


이 부분에서 나름대로 원문을 변경하지 않고는 성 베르나르도의 라틴어를 표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원문을 보면서 성 베르나르도가 얼마나 훨씬 강하고 분명하게 말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이것은 깊은 묵상과 연구가 요구되는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이 구절은 에카르트에서 잠깐 살펴본 영혼과 하느님의 일치에 대한 그런 역동적인 개념으로 가득합니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한 설명이 있는 이 책들에는 똑같은 원리들이 있습니다. 풍부한 은유와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실체를 나타내려고 하며 관상 기도에서 하느님에 대해 직접적인 직관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 직관은 사람이 평범한 수준에서 즐기는 실체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불과한 모든 비교 대상을 능가하는 깊고도 역동적이며 생생한 것입니다. 말할 것이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행간을 읽어내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상상과 은유도 하느님에 대한 관상적 경험으로 우리 영혼이 이해하는 것을 전달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주부적 관상이란 분명히 역동적이고 생생하고 창조적이며 변화적인 수동적 요소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내적 혁명이며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고 모든 소망들을 넘어서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혼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평범한 일상적 생각과 소망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주부적 기도의 첫 번째 신호는 이런 설명할 수 없지만 두려움 없는 노력이고, 무미건조함이나 어둠이나 좌절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추구입니다. 반면에 주부적 기도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평화를 발견하고, 고통 속에서도 기쁨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믿음과 맹목적인 소망이면 충분합니다. 분명한 지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위 본문에서의 관상적 경험에 대한 설명은 모두 똑같은 수준에서 그것을 고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으로부터 인용한 부분은 기초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른 세 본문, 특히 라이스브뤅의 본문은 더 고급 단계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관상의 입문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분명한 경험을 하기 전에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 이유도 모른 채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향해 맹목적으로 다가가는 일종의 미리 경험하는 관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야 영혼이 더듬어 찾은 이 “어떤 것”이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나 그분과의 일치에 대한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하고 주관적인 확신이 듭니다.

메마름에도 불구하고, 탐구에 대한 분명한 절망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맹목적이고 두려움 없이 찾는다는 사실은 미리 경험하는 이 관상이 주입되었다는 신호입니다. 또 다른 신호는 기도의 어둠 속에서 일반적인 관심사나 평범한 생활수준에 대한 망각일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관상적 추구가 어떤 면에선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아주 합당한 것입니다. 반면에 평범한 삶에서의 이성적인 선입견과 객관적 사실처럼 보이는 것은 이제 거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무의미함과 비슷한 의미는 모든 곳에 널리 퍼져있고 모든 지성적인 사람들에게 다소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헛됨을 느끼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만으로 관상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할 눈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세속적 존재가 그 무의미함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모든 민감하고 지성적인 사람들이 관상적 정화와 비슷한 것 중 하나를 미리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그들은 이것에 의해 매우 건강하고 유익한 영적 이탈을 배우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리 경험하는 관상이 주입된 특성을 가진다는 세 번째 신호는 영혼을 신비 속에 꽉 붙들어 매는 매력에 대한 분명하고 강한 느낌입니다. 영혼이 고통과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영혼은 이 무미건조함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어떤 열망도 가지지 않습니다. 영혼은 자연 상태의 즐거움과 빛과 휴식에 매혹을 당하기보다 그것이 혐오감을 준다는 사실을 압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영혼을 쉴 수 없게 할뿐입니다. 창조물은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영적 위로조차도 그 힘을 잃고 진저리가 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쁨과 평화와 성취는 이 무미건조한 고독한 밤과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라는 확신이 점차 커집니다.

때때로 이 매력은 너무나 강해서 영혼이 느끼는 모든 고통이 상쇄시키는데, 영혼은 자신의 고통과 무가치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고독과 어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평화에 대한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열망을 크게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매력에 이끌려오거나 신앙의 밤을 통해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사랑의 힘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갑자기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자각하게 됩니다. 영혼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놀라운 방법으로 어느 날 갑자기 이 어둠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사방에서 영혼을 둘러싸고 끌어당긴다는 느낌으로 압도됩니다. 사실 그분은 항상 거기에 계셨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분이 인식됩니다. 그 순간에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한 존재가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둠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지만 그것은 웬일인지 대낮보다 더 밝습니다. 영혼은 새로운 세계, 다른 모든 지식과 다른 모든 사랑의 차원을 초월하는 강렬한 경험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때부터 그 모든 삶이 변화됩니다. 외적으로는 고통과 어려움과 힘든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영혼의 내적 삶은 완전히 단순해집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각, 하나의 문제, 하나의 사랑, 즉 하느님만을 생각합니다. 영혼의 눈은 만물 중에서 그분만을 올려다봅니다. 이렇게 영혼이 올려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최상의 흠숭과 탄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계속해서 희생을 바치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보속을 드립니다. 그것은 완전한 기도이고 완전한 흠숭입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사랑입니다. 성 베르나르도의 말과 같이 그 사랑은 영혼의 모든 다른 활동을 그 자신 안으로 끌어당기고 사로잡습니다. Amor caeteros in se omnes traducit et captivat affectus.3)(아가서에 대한 강론 83) 하느님에 의해 영혼에 주입된 이 사랑은 그 영혼의 모든 힘을 하나로 하여 세상과 멸망하는 것에 대한 열망과 애정에서 점점 더 분리시키며 그분께 들어 올립니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해도 영혼은 급격히 진보하며 자유롭고 고결하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자신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 영혼은 영성 생활의 성숙함과 빛나는 길로 들어가고 (거룩함과 참된 관상이 발견될 수 있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로 이끌립니다.




[제 8 장]


밝게 빛나는 길의 역설


조금 전에 설명한 변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하느님의 발견은 엄밀히 말하면 외적 생활에서 내적 생활로의 이동입니다. 넓은 의미로 말하면 “내적 생활”이란 말은 보통은 상당한 양의 독서와 묵상과 수덕생활에 대한 강조와 함께 기도와 자기 수양에 따르는 일종의 노력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적 생활은 이 내적이고 영적인 자각이 깨어나는 생활이며 이렇게 될 때까지 “내적 인간”은 죽어 있거나 적어도 잠들어 있습니다.

외적 인간의 생활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활이고 우리 주위의 표준과 선입견에 기계적으로 적응하는 생활이거나 그것에 대해 기계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반발하는 생활입니다. 외적 적응에 대한 저항이 내적 생활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또 다른 강제적인 형태가 될 뿐이고 실로 똑같은 강제의 또 다른 면일 뿐입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적응입니다.

이런 “기계적인” 수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어느 정도까지 소외되고 자발성을 빼앗기는지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의 습관과 기계적인 일상은 일종의 자발성과 비슷한 것, 거짓된 자연스러움에 만족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거짓되고 비자발적인 것은 두 번째 본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분명한 생각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혼란스러운 생각입니다. 그들에게 올바른 의지로 보이는 것은 사실 비겁한 회피입니다. 그들에게 자유처럼 보이는 것은 강제일 뿐입니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실제로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 정신이고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내적이고 영적인 사람의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신이 없고 자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사실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조차도 항상 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평범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극히 드문 순간만 “깨어있을” 겁입니다. 그리고 다시 포로 신세가 될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길의 역설은 내적인 사람의 자각과 계몽이 외적인 사람의 어둠과 맹목과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인 영적 의식이 눈을 뜰 때 우리의 외적이고 세속적인 의식은 활동 중에 정신을 잃고 방해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초기 단계이며 변화 과정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완전히 정화된다면 외적인 의식에 의한 실패는 없게 되며 그것은 이제 부차적인 것이 되고 실로 내적이고 관상적으로 깨어나는 모습을 띄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강조해야 할 점은 내적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우리가 묵상을 할 때의 친숙한 추론적이고 이성적인 빛조차도 어둡게 하고 잠들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둡게 하려는 특별한 노력은 개인이 할 수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활동에 의해서 시작되고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은 대개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동성이 너무 강해서 영혼이 어둠, 즉 주입된 빛의 길에 어떤 방해물도 둘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우리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 협력은 지금까지 만족스럽고 유용하다고 판명된 친숙하고 수고스러운 기도와 헌신을 계속하려는 노고가 아닙니다. 이 수고스러운 노력이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되자마자, 즉 수동적 흡수의 더 평화롭고 신비스럽고 매력적인 힘에 대해 명백히 방해물처럼 보일 때, 그 노력은 사라집니다.

여기에서 습관은 강하고 기계적 행위는 거짓 양심의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할 때 죄의식을 느낍니다. 어둠 속에 “도달”한다는 것이 신앙에 대한 진지하고 강력한 노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메마른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이 엄청난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일단 깨닫는다면 이 죄의식에 대한 이성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다른 인간적 의식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도 없고 다른 이들과 접촉할 수도 없고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걸을 수밖에 없는 이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유리함이 있는 “안전한” 일상을 따라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그것뿐 만이 아니라 우리는 물위에 서 있다는 느낌까지 강하게 가지게 됩니다. 다시 안전한 습관이라는 배에 올라타야 한다는 충동을 거의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상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한 절박함은 우리가 자주 수동적인 미리 경험하는 관상(이것은 또한 같은 것인 감춰진 관상으로 통합니다)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할 때 묵상하고 기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느낀다는 사실로부터 옵니다. 그것뿐 만이 아니라 우리는 생각했던 것만큼 덕이 높지 않다고 믿으며 그 증거를 가지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런 자각은 물론 주입된 기도의 가장 가치 있고 부러운 효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외적 자아의 하찮음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외적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하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 자신을 악하고 죄많고 위선적이고 아주 경멸할 만한 존재로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외적 의식에서만 살고 우리 자신을 존재의 피상적이고 덧없는 면과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비현실적인 것에 완전히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상태에 대한 열망에 집착하는 것은 전문적으로는 ‘자존심’으로 알려진 모든 죄악의 뿌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헌신하는 궁극적 실체로써, 하느님의 존재와 진리에 대한 우리의 비실재의 확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인 우리의 참자아이며 그 곳에 더 깊숙이 존재하는 실체와 일치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비실재로부터 이탈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이 외적 자아의 생각, 소망, 활동, 헌신과 계획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그것은 그 외적 자아의 비실재와 허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외적인 영성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이 아무리 외적으로 보여도 그것이 성실함에 뿌리를 둔다면, 그것은 내적인 사람에 근거를 두고 하느님께는 가치가 있고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노력과 소망을 내적 자아의 지성소에 이르게 하고 그것을 내적이고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의식의 지배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신비적 삶이 시작되고 그 발전이 크다면 역설적인 밝게 빛나는 길은 모든 영성 생활이 무너지고 발전이 끝났다는 당황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우리는 갑자기 다시 되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영성 생활이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실수투성이에 제한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거의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숨겨진 활동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인 관상이 시작되면 악전고투하며 저항하는 분명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과 천사의 싸움이며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싸움이며 타락한 영혼과 하느님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블레이크의 예언적 책의 아주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모든 영적인 싸움의 원조격인 창세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은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타나 동이 트기까지 그와 씨름을 했다. 그분은 야곱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분은 동이 밝아 오니 이제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 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썼다. 일이 이쯤 되자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이 말을 듣고 야곱이 말했다. “당신이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창세기 32:24-29)


그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지만 “하느님”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닮은 대리자이며 우리가 처음에 알고 있는 그 유일한 자아와 완전히 반대인 듯한 내적 자아에 대한 외적 자아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외적 자아에 머무르는 우리의 힘이 내적 자아의 생명이며 실체인 하느님의 힘과 싸우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일어나는 그 싸움에서 내적 자아인 천사는 우리의 엉덩이뼈를 쳐서 절뚝거리게 합니다. 우리가 원래 가진 힘은 제한되고 약해집니다. 우리는 초라하고 무지해집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졌고 순조로울 때조차도 절뚝거리고 나약하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우리가 악으로 이끌린다고 하여도 더 이상 재빨리 그것을 추구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자를 제압할 수는 없지만 복을 빌어주기 전에는 그를 보내 주지 않을 정도의 힘은 있습니다. 이 힘은 우리 자신의 힘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며 내부로부터, 그 상대방으로부터 은밀하게 나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바로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을 붙잡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무지의 구름에 따르면 “그분을 붙잡고 차지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겨루어내게” 하고 “하느님을 본 사람”이라는 의미인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줍니다. 이 새로운 이름이 우리를 관상가로 만드는 것입니다. 관상가는 새로운 존재이고 경험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방의 이름을 물었을 때 우리는 그 이름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지지 않은 것과 같이 우리의 가장 은밀한 자아조차도 알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주입된 빛에 의해 정화된 영혼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설명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수준의 정화가 있습니다. 완전한 신비 생활에 대한 준비 단계로써 외적 감각과 내적 감각에 대한 정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의 어둔 밤”이라고 불리며 그것은 우리가 신비적 관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넘어가야 하는 일반적인 문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더 깊고 무서운 밤, “영의 어둔 밤”이 있습니다.

감각의 어둔 밤에서 외적 자아는 정화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파괴됩니다. 그러나 영의 어둔 밤에서는 내적 인간까지 정화됩니다. 이 두 가지 밤은 두 가지 영적 죽음입니다. 처음에 내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외적 인간이 “죽습니다.” 두 번째로 내적 인간이 죽고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여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하느님과 내적 인간은 하나가 되고 그 본성에 대한 불가사의한 차이를 제외하면 그들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영혼이 하느님이며 하느님이 그 영혼인 것과 같으며 더 나아가 그 영혼이 “순수한 포도주 한 잔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쨌든 일상적이고 혼란스럽고 강제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영혼의 활동은 영적이고 자유롭고 빛을 받아 하느님이 중심이 된 완전한 사랑의 활동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영혼 안의 모든 것은 완전히 없어져야만 합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나 그 모든 작용과 능력은 하느님께 들어맞지도 다다르지도 못하기 때문에, 영혼은 모든 피조물과 그 모든 작용과 능력, 즉 알고 즐기고 느끼고 하는 따위를 벗어 던져야만 한다. 하느님과 닮지 않고 당신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을 내던진 다음에야 비로소 영혼이 하느님을 닮게 되고, 나아가 하느님의 뜻 아닌 것이 그 영혼 안에 있지 않아서 하느님 안에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갈멜의 산길, 2권 5장 4)


이 책에서 주입된 관상의 입문에 대해서 거의 완전히 다루었기에 우리는 밝게 빛나는 관상의 길로 인도하는 감각의 어둔 밤에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밤의 모든 고통과 얼떨떨함과 모든 좌절감에 대해 그것이 하느님의 커다란 선물이며 우리의 모든 힘과 온 마음을 다한 사랑으로 일치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 9 장]


무엇을 해야 하나? :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


하느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주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신뢰할 만한 신비 신학자 중의 한 명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이런 커다란 선물을 받기 위해 그 영혼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며 그 분의 일을 망치지 않고 어떻게 잘 사용해야하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관상 기도를 할 때 유능한 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방해물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그 영혼의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그 본성적 거침과 서투름은 그 가장 내면 깊숙이에 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행되는 그 미묘한 작용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없고 하느님의 활동과 협력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깨닫는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확신에 찬 모든 생각을 희미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며, 살아계신 하느님과 실제로 접촉하는 경험의 문턱으로 여러분을 이끌기 위한 징표도 없이 왕국으로 인도하는 모호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이 신앙의 빛이 가진 엄청난 가치를 믿어야합니다. 사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궁극적인 실체와 진리의 광채에 의해 우리의 유한한 힘을 잠재우면서 지성 안에 계신 당신의 현존에 의해 이 어둠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어둔 밤이란 영혼에게 끼치는 하느님의 한 작용으로서 영혼을 그 자연적이고 영적인 무지와 불완전에서 정화시키는 것이다. 관상가들은 이것을 주부적 관상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영혼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부적 관상이 무엇인지도 몰라도 하느님께서 영혼을 은밀히 가르치시고 완전한 사랑으로 길러주신다. (어둔 밤 2권 5장 1)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이 위대한 은총의 작용과 협력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엄청난 빛이 여러분에게서 쫓아내려고 하는 것을 바라거나 추구하지 말아야하며 오히려 그분께서 당신 자신의 진리로 그것을 대신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를 하며 하느님에 대해 정확하고 이성적으로 알 수 없거나 더 이상 그 분을 분명하고 확실한 생각으로 파악할 수 없을 때에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의지가 더 이상 하느님의 것에서 달콤함이나 위로를 찾을 수 없고 여러분의 상상력이 흐려지고 혼란에 빠질 때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정신과 의지가 본성의 경계를 넘어서 이끌린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실체의 현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과 의지는 더 이상 익숙했던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정확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그 실체이시며 이제 그분께서 말없이 이끌리고 조용히 열망하는 다소간 혼란스럽게 보이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그분 자신의 빛과 사랑을 부어주시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행동으로 하느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늘리거나 사랑의 느낌을 증대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고 그분은 그분의 빛과 은총을 거두어 가시며 여러분은 잘못 인도된 여러분 자신의 본능적 활동의 열매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종류의 만족을 위한 여러분의 정신과 의지의 본능적 욕구는 이 단단한 체제로 보이는 것에 대해 고통을 받고 반감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한 성인의 말을 기억합시다.


이 사랑스럽고 어스레한 지식에 의해서 하느님께서는 매우 숭고한 하느님적 수준에서 영혼과 하나가 되신다. 이 사랑스럽고 어스레한 지식, 곧 신앙이 이승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하는 역할이, 저승에서 영광의 빛이 하느님을 밝히 뵙게 하는 그 역할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갈멜의 산길 2권 24장 4)


여러분 자신을 쓸모없는 내적 활동으로 뒤흔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불필요한 분란을 가져오는 모든 것을 피하십시오. 가능한 한 많은 평화와 침묵과 휴식 속에서 살도록 하십시오. 일과 의무가 아무리 하느님께 커다란 영광을 드린다고 하여도 그것에 열중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여러분의 소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덤덤한 사랑과 커다란 평화로 가능한 한 여러분에게 정해진 일을 완전히 하십시오. 평화롭게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모든 일에서 평정을 유지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을 호들갑떨지 말고 조용히 하십시오. 가능한 한 고독을 찾으십시오. 침묵하는 영혼 속에 머물며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어주시는 단순한 빛 속에서 쉬도록 하십시오. 위대한 신비가들의 성인전에서 읽은 눈부신 “경험”을 열망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감사의 선물(gratis datae)이라고 불리는 그런 은총들 중에서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을 완전하게 만들려는 그 목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모호하고 정화적인 빛과 사랑만큼 여러분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영혼은 자연적으로나 영성적으로 알거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밀쳐 두고, 알 수 없고 그 본질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에로 오기를 열렬하게 바라야한다. 세속적으로나 영성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며 이승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모든 감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당신께 오기를 열망해야 한다. (갈멜의 산길 2권 4장 6)


기도의 길에서 진보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밟아 다진 행로를 떠나 측량할 수 없는 길로 여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정화와 관상의 단계를 돌보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진전했는지 측정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쓸모없는 자기 성찰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추구하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더욱 더 정화하고 자신을 더욱 더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더욱 더 완전하게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또한 더 단순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더 완전하고 단호한 신뢰를 가지고 그렇게 하십시오.

여기에 과거로 되돌아가도록 유혹받고 현혹당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관상의 어둠에서 근심과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 상담자에게 보낸 십자가의 성 요한의 편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이 어둡고 영적 가난의 공허한 곳을 걷고 있을 때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저버린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이 때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저버린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당신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어떤 것도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느낌일 뿐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어둠과 가난을 발견하더라도 어둠 속을 걷지 않습니다. 주제넘은 생각을 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해서나 창조물에 대해서나 자신의 만족을 바라지 않고 무에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은 당황하거나 어떤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훌륭하게 진보하고 있습니다. 침묵 속에 머무르며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였던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 보다 더 겸손하거나 순종적인 적이 없었고 당신 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을 이처럼 가치가 없게 여긴 적이 없고 지금보다 하느님을 더 순수하고 사심 없이 섬긴 적이 없고 더 이상 당신에게 익숙한 당신의 의지와 흥미의 불완전함을 쫒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지 18, 도나 후아나 데 페드라자 수신)


관상의 어두운 길을 따라 갈 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여기 있습니다. 자신의 즐거움과 고통을 보기 위해 옆으로 비켜서거나 어떤 것에서 자신의 만족을 구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맡겨 드리고, 모든 걱정과 근심을 놓고, 그분을 믿고 신뢰하고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자신의 소망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직접적인 뜻과 언제나 우리를 무와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그 은총이 커짐에 따라 자신의 뜻과 일시적인 생각과 행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총과 영감은 관상가의 영혼에 개인적 만족이나 성취를 위한 강하고 열렬한 소망의 형태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 순명과 대립한다면 우리는 항상 그것을 의심해야만 합니다. 관상의 은총은 항상 겸손과 어두움과 무의 길로 이끕니다.


무에서 만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완덕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본성적이고 영적인 욕구는 무에 만족할 것이다. 영혼의 가장 깊은 평온함과 평화에 이르려면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사랑은 단순하고 순수한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한다. (금언 51)


만일 여러분이 이 길을 성실히 따라 걷는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십자가를 기쁘게 맞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한 고통을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지극한 평화와 온유와 내적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과 함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깨닫고 또한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되찾아 주기 위한 도구로 이런 것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게 됩니다.

성성(聖性)과 관상은 오로지 정결한 사랑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참된 관상가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신앙과 사랑 속에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일치되어 있고, 그분 안으로 들어가 변화되도록 자신을 성령께 내맡기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영혼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의 원천이고 원인이 됩니다.


꿀벌이 온갖 화초에서 꿀을 따기 위해서만 그 화초를 이용하듯 이 영혼도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매우 쉽게 거기 있는 사랑의 단맛을 끌어낸다. 그 모든 것이 달든 쓰든 그 안에서 이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한다. (영혼의 노래 27노래 8)


그와 같은 영혼에게는 이런 저런 일이 즐겁 즐겁지 않 점차 희미해지다가 눈에서 사라져 간다.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분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고, 우리는 그 분께서 모든 것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시는 사랑을 알아봄으로써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으니, 관상가는 인간적 존재가 가지는 즐거움과 고통 속에 있는 똑같은 기쁨을 일상생활에서 누리는 기쁨과 슬픔 속에서도 찾아낸다. “왜냐하면 이 영혼은 사랑할 줄밖에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하던 간에 이 영혼은 다만 하느님 사랑의 기쁜 맛밖에 모른다.” (영혼의 노래 27노래 8)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관상의 가치를 말하기 위하여 단호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엄청난 활동을 하고 그 외적 행위로 전 세계를 감싸려고 상상하는 이들이여 반성하기 바란다.만일 그들이 활동에 바친 시간의 반을 기도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데 쓴다면성교회를 위해 훨씬 유익한 자가 되고 한층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그들은 단 하나의 행위로 천 가지 행위보다도 더욱 많은 일을 하고 게다가 노력은 보다 적게 들 것이다. (영혼의 노래 29노래 3)


성인은 덧붙이기를


순수한 사랑은 비록 아무리 적더라도 다른 모든 행위를 합친 것보다 하느님 눈에도 사람의 눈에도 귀중하고,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하듯이 보여도 성교회를 위해 한층 유익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노래 29노래 2)









 

        

         



            

[제 10 장 ]


위험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들은 성인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1) 그는 하느님의 교회나 다른 사람을 위한 모든 의무와 책임과 활동과 수고를 철저히 거부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가장 위대한 관상가인 그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매우 활동적이었으며 갈멜 수도회의 개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 요한이 주장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즉, 우리 자신의 취향과 야망으로 자극받은 활동은 불완전 투성이가 되어 우리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일치를 한결같이 방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정신과 의지가 하느님께 완전히 일치하고 흡수되어 그분 사랑과 자비의 자유로운 도구로써 그분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를 이 완전한 일치에로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전하도록 관상가들을 사용하십니다.

이와는 달리 정적주의(quietism, 17세기 말의 신비주의적 종교운동) 이단설은 다른 사람은 물론 하느님조차 몰아내는 완전히 이기적인 고독으로 사람을 그 자신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정적주의가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관상과 유사하게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관상가는 하느님의 사랑만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모든 창조된 사랑을 비워내고 그의 영혼으로 곧장 비치는 하느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모든 창조된 형상과 환영을 없애버립니다. 반면에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무(無)’로 만드는 거짓된 이상을 쫒는 정적주의자는 자신에게서 모든 사랑과 지식을 비워내고 움직임도 없고 생각도 없고 판단도 없고 사랑의 활동도 없고 수동적인 받아들임도 없고 내적 생활의 빛이나 따듯함이나 생명력조차 없는 공백일 뿐인 일종의 영적 진공 상태 속에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적주의자는 자기가 하느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부적 사랑의 가장 탁월하고 섬세한 활동에 의해 영혼 안에서 생겨나는 그리스도교 관상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모든 덕을 완전하게 하면서 영혼을 완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정적주의자들에게 덕에 대한 추구는 ‘이기주의’이고 하늘나라에 대한 열망도 역시 ‘이기주의’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희망은 거래로 간주됩니다. 덕을 행하고 죄를 피하려는 열망은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이 ‘무(無)’가 된 영혼의 ‘평화’를 깨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관상은 사랑의 완성인데 반해 정적주의는 모든 사랑을 배척합니다. 실로 그것은 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정적주의자는 자신의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신앙과 자아포기로 직면하게 하신 삶의 모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망쳐 버리기 위해서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적주의자의 “기도”는 결코 기도가 아닙니다. 정신과 의지가 완전히 생기를 잃고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이나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하여 의식적인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런 현상들에 맞서려는 노력도 없이 분심과 유혹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흘러 들어오도록 놔두면서 그들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상이 하느님에 대한 어떤 사랑이나 열망도 없이 완전히 공허이거나 단지 영적 혼돈 상태라면 여러분이 관상가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커다란 시련을 겪을 때뿐만 아니라 관상을 시작할 때에도 하느님에 대한 열망과 자각은 너무나 깊고 너무나 조용하고 아주 희미한 것이어서 그런 열망과 자각이 있다는 것조차 깨닫기 어렵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살짝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그런 열망과 자각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사실 참된 관상가는 그가 하느님에 대한 열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을 겪는데 바로 그 고통이 그의 열망의 증거가 됩니다. 이런 고통은 흔히 주부적 사랑의 작용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절망적으로 메마르고 산만하다고 걱정할 때조차도 그리스도교 관상가는 하느님을 애타게 바라는 격렬한 고통에 의해 그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의 정반대의 상태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고통과 열망을 느낀다면 여러분이 정적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하십시오. 사랑과 겸손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을 하고 활동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해졌을 때 정적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그와 같은 것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금까지 설명해 온 관상의 표징을 여러분 안에서 확인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치명타가 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며 외로움과 고독과 메마름과 번민에 휩싸인 그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십시오. 고통의 밤에 그분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은 여러분의 가장 감동적인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성 교회에 훨씬 더 값진 것이 되고, 지성이나 상상력이 가장 높은 자연적 단계로 고양된 것보다도 더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이때에도 여러분의 지력과 의지를 당신 성령과 일치하는 초자연적 활동의 지고(至高)의 완성에로 들어 높이기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 안에 당신 지혜를 부어 주심으로써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가장 위대한 일을 성취하고 계시며, 여러분 안에 육화하신 말씀,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상을 만들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 안에서 변화되고 들어 높여진 여러분의 자유 의지를 통해 그분께서 완성하시도록 여러분이 내어맡긴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그분의 교회를 완전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의 첫 열매들을 맛본 여러분,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그분의 위대하신 일을 계속 이루시도록 그분께 기도드리십시오. 모든 근심을 그치십시오.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십시오. 순명과 사랑과 그분의 섭리로 이루어진 일들에 의해 그분께서 여러분을 손수 그분께로 이끄실 때까지 그분을 위하여 큰일을 성취하려고 하거나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계획하신 일을 수행하려고 하거나 그분 사랑의 불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사용하시도록 안달하거나 애쓰지 마십시오.

관상과 정적주의의 피상적인 유사함, 특히 이론적인 유사함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관해 글을 쓰는 작가는 독자들이 이 두 가지 것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행적인 의무이며 필요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논리적 결과로 인해 기계적으로 정적주의를 뒤따르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소수의 사람들 일지라도 부정적인 무기력과 긍정적인 관상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출발부터 갈피를 못 잡고 필요한 노력과 관심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관상가들은 항상 삶에서의 필연적인 ‘무’를 너무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패로부터 덕을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현대 관상가들은 자신이 실존주의자들과 똑같은 영역으로 다가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비종교적인 실존주의자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종교의 한 면은 신자 개인이 영웅적 모험에 투신하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개념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궁극적인 존재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개념을 넘어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결정을 내리게 하는 기도의 이런 외롭고 고독한 어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큽니다. “불합리한”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로써 개인의 절대적인 자율, “불합리한”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과 일상생활에서의 명백한 불합리함을 넘어선 초월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다른 존재에게 마음을 열 수 없는 사람과 자신을 잊고 궁극적인 ‘존재’에 잠겨버린 사람의 차이입니다.

실존주의자와 관상가의 한 가지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관계가 없는 본질에 대해 설명하려는 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지만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치2)(Paul Tillich)는 신앙이란 “궁극적인 관심사”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실존주의적인 이 정의에서 그는 걱정거리를 피하기 위해서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계시 종교의 신앙 고백이나 종교적 개념을 더욱 더 사용하게 되는 자기만족의 방법에 대해 확실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를 (다시 회복하기를 바라는) 제멋대로인 종교의 시대로 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 특히 통속적인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의미도 없는 구호에 손쉽게 수긍하며 신앙을 버리곤 합니다. 과학적 실험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며 이 중요한 문제를 책임지신다고 들었던 막연한 하느님에 대한 책임감을 떨쳐버린 것뿐입니다. 솔직히 보통 사람은 자신에게 전념하고 세속적인 생활, 돈벌이, 즐거움과 성공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깁니다. 거룩한 세계로의 조심스러운 이탈은 세속적 목적을 이루는데 하느님을 이용할 필요가 있는 기도나 공동체적 행위만으로 제한됩니다. 그런 “믿음”은 물론 현대의 미신에 불과한 것이며 틸리치의 정의는 아마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에서 그런 것을 완전히 배제하는데 적합할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나 관상가는 모두 그들의 깊고 참된 “관심사”에 의해 하나가 됩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손쉽고 편리한 대체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 모험의 불확실과 어둠을 직면합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적 실존주의자와 비종교적 실존주의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실존주의자로 여겨지는 사르트르3)(Sartre)가 무신론자이기도 하지만 많은 실존주의 사상가는 오히려 종교적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 모두의 사부로 여겨지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반종교적인 시대의 위대한 종교적 천재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성교회의 가브리엘 마르셀4)(Gabriel Marcel)과 러시아 정교회의 니콜라스 베르디예프5)(Nicholas Berdyaev)와 같은 사람은 그들의 전통적 유산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실존주의에 관해 매우 뛰어난 토미즘 비평서를 썼던 쟈크 마리탱6)(Jacques Maritain)은 그리스도교 관상가이기도 했는데 그의 관상은 허무주의의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면서 주관적 슬픔과 참된 실존주의와 조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우리 시대의 주관론자 사이에 토론이 벌어진다면 관상가는 분명히 그리스도교를 대변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학문적 영역에서 확고하게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독단주의자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이해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반대 입장의 사람과 유익한 토론을 하려고 하기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낫습니다. 거기에도 독단적 주장과 권위와 “참된 신도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관상가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통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같은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결코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려면 영적 성취에 대한 모든 내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를 억누르고 혁명에 대한 집단적 신비에 정신을 빼앗겨야 할 것입니다. 관상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변증법에 매력을 잃어버린 후에 그 반발심 때문이거나 때론 아주 드물게 내적 갈증의 요구를 인식하는 바로 그때에만 관심을 끌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결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없던 보리스 파스테르낙7)(Boris Pasternak)과 같은 작가는 1917년 이후 러시아의 유물론의 메마른 사막에서 살아남은 실체에 대한 영적 경험에 대한 강렬한 갈증의 증거가 됩니다. 파스테르낙이 참된 의미에서의 관상가라는 말이 아니고 그의 시와 시적 언어들이 관상(theoria physike)에 따른 상징적 직관으로 가득하고 그의 인생관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일뿐만 아니라 신비적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비주의”란 말이 최고의 경멸을 의미하는 러시아에서 그를 완전히 이단자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는 영적 종교의 대용품을 갈망하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거짓 신비주의와 광적인 신앙이 충분히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신앙”과 헌신의 요구가 오로지 세속적 가치에만 전념하는 사회에 여전히 번성하는 무책임한 가짜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인간적인 현실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세계관이 내포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가짜 관상에는 영적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위험은 ‘신’의 관념이 기진맥진하여 죽어버린 통속적 종교의 공허한 형태를 마음내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비밀스런 종교적 호소에도 있습니다.

관상 생활의 더 시급한 문제로 돌아갑시다. 영적 경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이 마주치는 커다란 위험 중의 하나는 몬시뇰 녹스(Mgr. Knox)8)의 말로는 “광신”이라고 하는 광명주의의 위험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주관적 경험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것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고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경험이 일단 객관화되면 그것은 우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사물”이나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섬기도록 창조되지 않았고 어떤 “사물”이지도 “사물”일수도 없는 하느님만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객관적 대상”이 아닌 분을 섬기는 것은 ‘자유’입니다. 영적 경험을 위해 사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고 그런 노예화는 돈이나 즐거움이나 성공과 같은 어떤 “대상”에 대한 섬김과 같이 관상을 세속적(더 미묘한 방법일지라도)으로 만듭니다. 실로 많은 잠재적인 관상가를 몰락시키는 것은 이런 영적 성공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초반부에서 관상 생활의 목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한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서 끌어내는 만족이 순수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만큼 더 위험합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비판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 모든 직관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믿는 위험이 생깁니다. 영감의 빛으로 치장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어떻게 비평할 것인지 잊어버릴 때 가장 큰 잘못을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영적 경험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마약을 사용하려는 대중적 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인디언 부족의 예식에서 (선인장에서 만든) 환각제가 무아경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잘 알려져 왔습니다. 임상 실험학자들은 알코올 중독과 정신병을 치료할 때 메스칼린 흥분제와 리세르그산(환각제의 일종)을 가지고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약들이 신비주의자의 것과 비슷한 깊은 영적 경험을 자주 유발한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 환시와 무아경이 있었고 다른 경우에 공포와 절망의 부정적인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 약은 그것을 복용한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내심을 드러내도록 돕는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앨더스 헉슬리9)(Aldous Huxley)는 이 경험이 정말로 영적인지 아닌지 밝혀내려는 목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의견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는 메스칼린과 리세르그산을 이용한 자신의 실험, 그리고 실험이나 치료를 목적으로 그것을 사용한 다른 사람의 보고서를 근거로 판단을 하였습니다.

이 실험의 최종 결과가 무엇이건 간에 매우 조심스럽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 사실이 틀리지 않으며 보고 된 체험들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런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다는 결론을 내릴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커다란 규모로 조직화된 광명주의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영적 경험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추구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애착이 다른 것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만큼은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느 모로 보나 이유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 같은 환시와 영감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런 모든 일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육체 감각에 내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의지하기보다 우선 전적으로 피해야하고, 좋은지 나쁜지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보다 더 외면적이고 감각적인 것일수록 하느님의 것이라는 확실성이 보다 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을 높이 여기는 사람은 크게 잘못을 범하며 자기기만의 위험에다가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이니, 적어도 영성 생활에서 온전한 장애를 스스로 떠안는 셈이다. (갈멜의 산길 2권 11장 2-3)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영적 경험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는 내면성이나 본래의 순수함이나 기쁨이나 빛이나 변화적 효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느낌이나 경험의 수준을 넘어서 진실로 무엇이 일어나는가 입니다. 참된 관상에서는 창조된 사람의 가장 은밀한 존재와 하느님의 무한한 실체의 접촉이 일어납니다. 이 접촉에 따라오는 경험은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과 통찰력과 직감 등은 단지 표징일 뿐이고 더욱이 어떤 실체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공허한 표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광명주의자는 경험을 초월하는 접촉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은 중요시하지 않고 표징과 경험에만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약을 사용하여 일어난 경험이 초자연적인 것과 연관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 선물의 주관자이시고 그래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요점은 여기에 기만의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관상가들에게 닥친 가장 커다란 위험은 광명주의의 이런 그럴듯한 유혹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런 위험한 방법들의 남용으로부터 일어나는 신비적 종교의 왜곡과 타락을 커다란 불안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관상가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도 순전히 영적인 이유로 그런 약을 복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격이 있는 의사가 의학적 필요로 처방을 내렸을 때에만 그런 약의 사용에 동의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 한 의사들은 성급하게 그런 처방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참된 관상가는 절제와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침묵과 겸손을 좋아합니다. 그는 영적 흥분을 맛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를 쉽게 지치게 합니다. 그는 그에게 거의 아무것도 혹은 전혀 말해주지 않거나 아무것도 약속해 주지 않는 ‘무’를 선호하는 듯이 보입니다. 계획이나 허영심도 없고 자신이 분명히 쓸모없다는 것을 변명하지 않고 ‘공(空)’ 속에서 평화로이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을 옹호할 마음이 생기게 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그런 영적 자극의 치명적인 호소로부터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상가는 모든 종교인들 중에서 자신이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잘 깨닫고 다른 사람의 눈에 성인으로 보이기를 가장 열망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사실, 그는 겉모습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해방되어 그것에 대해 거의 개의치 않습니다. 동시에,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반대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그는 겉모습에 대해 경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시할 뿐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바보로 여겨지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 배경에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된 것이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때때로 서방 교회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나 많은 다른 이들과 비슷한 ‘거룩한 바보(yurodivi)’들이 있었습니다. 관상가는 어떤 것에 대하여 의도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바보짓에 대해서조차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지혜에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그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하느님의 지혜에 만족합니다.







[제 11 장]


관상과 강박관념


이 책에서 바보짓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관상이 정신에게 ‘가장 평범한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그런 과도한 긴장’을 주는지의 문제를 잠시 심각하게 살펴봅시다. 긴장으로 인해서 건강을 해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 없이 참된 의무를 추구하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 환상을 추구하거나 심지어 참된 관상을 찾는 경우에도 정신 건강을 해치는 주제넘은 영적 야심에 대해서는 확실히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우선, 관상 생활은 특별한 정신적 영적 능력이 요구되며 필요한 선물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 분투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관상가가 특별한 엘리트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봉쇄 수도원에서의 생활과 같은 규범적인 의미에서의 관상 생활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정신적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내가 설명한 관상에 완전히 그리고 진지하게 열중할 수가 없습니다. 관상 생활은 강렬한 내적 대립의 생활입니다. 관상 생활이 가져오는 평화는 싸움의 뒤에 따라오는 평화이고 종종 그 싸움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평화입니다. 이미 내분이 있고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는 사람은 이런 고행적 묵상과 관상 기도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을 가라앉히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그의 안에 존재하는 내분이 그를 갈갈이 찢어 버릴 것입니다.

관상의 차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신분열적 특성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정신분열적 물러남을 관상적 평정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상투적인 표현의 관상적 전문용어는 외적 현실에서 마음속으로 달아날 뿐인 사람이 합리화에 필요한 기회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관상은 현실로부터 뒤꽁무니를 빼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습니다. 관상은 표면적인 존재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넘어서 갑니다. 이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분별 있는 판단을 함을 의미합니다. 관상적 밤의 “어둠”은 창조물에 대한 거절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관상가는 어떻게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깨달으며 단지 감각적이고 표면적인 것과의 접촉을 초월하며 더 높은 방법으로 그것을 즐깁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는 즐거움을 끊어버린 눈을 통해 영적 즐거움이 오니 그 보는 바가 거룩한 것이든 속된 것이든 보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향하는 것뿐이다. 듣는 즐거움을 끊어버린 귀를 통해 영혼에게 영적인 즐거움이 백배로 생기니, 그 듣는 바가 거룩한 것이든 속된 것이든 듣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다. 이미 정화된 다른 감각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의 첫 조상들이 정결한 상태에 있을 때 낙원에서 보고 먹고 말한 모든 것이 관상의 달콤함을 돋우어 준 것처럼, 모든 감각적 사물에서 감각을 끊어버리고 감각을 영에 종속시킨 사람은 그 마음이 움직이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을 알고 관상하고 흐뭇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갈멜의 산길 3권 26장 5)


반면에 신경증 환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 안으로 물러나고 사물들을 본다 해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의 모습만 볼 뿐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금욕주의의 무분별하고 이원론적 형태는 현실에 대한 병적인 태도만을 준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자신의 내적 어둠 속으로 달아나고 자신의 침묵 속에 스스로를 가두려고 하는 거짓 신비가가 될 위험이 매우 큽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아도취적 은둔의 거짓 달콤함을 즐기려하고 금단의 열매로 자신을 독살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때까지 정말로 그것을 즐깁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창세기의 타락 설화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에서 깊은 상징적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금단의 나무입니다. 이 자아의 나무는 낙원의 한 가운데에서 자라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거나 알아차릴 것 같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나무들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우리에게 열매를 주어 원기를 회복시켜줍니다. 우리는 그 나무들을 알아차릴 수 있고 하느님으로 인해서 거기에 있는 나무들을 즐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차리게 되고 우리 자신으로 너무 많이 되돌아오고 우리 자신을 믿으려고 하면 우리는 금단의 열매를 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 안의 불일치를 발견하고 동시에 외적 현실로부터 단절되기 때문에 ‘신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눈이 우리 자신을 보고 있지 않는 한 우리의 자유가 생겨나는 곳인 우리 안의 “무”는 하느님의 존재와 빛으로 은밀하게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는 하느님의 자유와 일치합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사랑의 행위의 기쁨과 독창성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자유의 근원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을 너무 의식하고 그것을 조사하고 의도적으로 그것을 지배하려고 할 때, (하느님은 일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과 힘은 사라지고 우리는 자신의 무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자유를 잃고 걱정거리의 포로가 됩니다.

이것은 관상 생활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신경증 환자는 영적 “경험”에 대한 기회를 자의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걱정을 경감시키고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종교 행위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그의 관상은 거짓이고 우상 숭배 행위이고 그의 개인적 종교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합니다. 관상 생활의 고독과 자유는 이런 사람들을 멸망으로만 이끌 뿐입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질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에 고독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정신분열적 가짜 관상의 어둠은 혼수상태이고 부자연스러운 기만입니다. 이런 거짓 평정 속에 있는 자의식의 강한 지배로부터의 유일한 탈출은 현혹적이고 꿈결 같은 무감각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참된 관상은 보통 고요하고 초연한 직관과 단순한 평화와 내적 침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자아에 대한 선입견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너무 많이 반성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책이나 그림이나 외적 현실로 눈을 돌리거나 내적으로 객관적 생각을 함으로써 본능적으로 거짓 몰두를 깨드립니다. 관상가도 안 좋은 날에는 현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로나 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의 열중은 혼수상태가 아니고 부자연스럽거나 병적인 것이 없는 맑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참된 관상은 긴장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참된 관상이 누군가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긴장을 풀어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병 등에 의해 육체적으로 지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러분의 전 존재를 쉬게 하고 원기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참된 관상에는 긴장이 없습니다. 그 선물이 참된 것일 때, 여러분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어떤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매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상가는 자신에게서나 그의 덕행이나 그의 상태나 그의 “기도”에서 평안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습니다. 관상의 평화와 “휴식”은 하느님 은총의 활동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관상가는 삶의 모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고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나 다른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재주에 대한 의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에 대한 복음서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습니다.

봉쇄 수도원에서의 관상 생활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많은 특수한 심리적 문제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엄격하고 제도화된 생활의 압력은 진실로 관상으로 불림 받은 사람들에게 조차 매우 과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아마도 관상을 돕도록 고안되었을 규칙을 가진 공동체에서조차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관상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통상적인 공동체 생활은 보통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사람들의 속도로 사는 것입니다. 내적 민감함을 견딜 수 없고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이 사람들은 결국에는 하느님께 봉사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그런 것을 확신하도록 맞추어집니다. 하루는 여러 활동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 활동 속에서 기도는 전례가 수행되는 시간과 정확성으로 판단됩니다. 관심은 외적인 성과에 집중됩니다.

수도원의 규칙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규칙 자체가 목표가 될 때 그것은 애초에 만들어졌던 그 목적을 방해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적 평화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외적인 것에 관심이 집중되고 모든 것에서 완벽할 필요가 있다는 강박증세가 있을 때, 참된 관상은 불가능해집니다. 관상은 숭고한 것이든 천박한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어떤 관심사든지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주의나 훈련의 부족이 규칙의 준수보다 내적 기도에 더 바람직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규칙적인 생활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훈련은 외적 현상에 관한 한 완벽주의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할 때에만 좋은 것입니다. 훈련은 우리가 자유롭게 묵상하고 기도를 할 수 있게 하면서 외적 현상들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분명히, 우리가 어떤 영혼으로 수도 규칙을 지키려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규칙이 사랑과 영적 자유의 표징이라면 그것은 관상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의식과 형식적 완벽주의의 징조라면 그것은 근원부터 관상 생활을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아주 비상한 사람입니다.



[제 12 장]


관상에 대한 열망


우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몇몇 단순한 생각들로 계속해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관상적 경험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지만 정의내리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영적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지만 하느님에 대한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현존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 경험의 모순된 특성이 지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조심스럽게 설명되어야만 합니다. 그 경험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분을 알려지지 않은 분으로 압니다. 그것은 “무지에 의해서” 압니다.

존재하시는 분이신 그분에 대한 이 “어두운 지식”, 이 “알 수 없는” 이해는 내적 생활에서 그와 같은 종류의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만족스럽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느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도 쉽게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이 이상한 점입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일어남은 윌리엄 제임스1)(William James)에 의해 행해진 것처럼 충분히 쉽게 경험적으로 입증됩니다. 제임스는 실용주의자로써 이런 상태의 의식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즉시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참과 거짓을 구분할 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다양한 신비가들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조사하면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특징을 선별하고 각자에게 일어난 신비적 경험의 특징을 설명하였습니다. 제임스의 연구의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신비적 관상이 적어도 필연적인 경험적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줍니다.

윌리엄 제임스보다 그 주제에 대해 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내부로부터 그것을 바라보려고 하면서 나는 관상이 실제적인 것이라고 다시 확신할 뿐만 아니라 보통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그 단순함, 온유함, 겸손과 완성이라고까지도 주장합니다. 이것이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관상적 소명의 범위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우리가 그것을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것”으로 생각하던지 아니던지) 그것은 여전히 적어도 적법한 모든 수준 높은 종교에서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건 불교건 힌두교건 이슬람교건 모든 곳에서 적어도 넓은 의미에서의 관상 생활의 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내적 일치와 절대자와의 직관적 친교에 대한 적어도 자연스러운 노력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곳에서 종종 일반적인 종류의 영적 경험과 이따금씩 초자연적인 종류의 영적 경험에 대한 표현을 발견합니다. 초자연적인 신비적 경험도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신이 주는 은총의 영감에 응답하는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이것은 물론 미묘한 논제입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화를 불러일으키는 지독하게 논쟁적인 문제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사실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듯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인 듯합니다. 관상은 과장되거나 왜곡되거나 위대한 것처럼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어느 누구도 어둠과 자기 망각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관상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많은 훈련을 의미하며 특히 일상의 덕행에 대한 평범한 훈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정의, 성실, 노고, 이타심, 자기 지위에 어울리는 의무에 대한 헌신, 순명, 사랑, 자기희생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우선 도덕적인 삶의 평범한 일과 의무를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관상적 열망으로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관상은 일종의 마술도 아니고 행복과 완전에 이르는 쉬운 지름길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관상이 우리를 신비스럽게 경험하는 나-당신 관계의 우정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기 때문에 관상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고 “세상은 줄 수 없는”그 평화로 우리를 반드시 이끌어 갑니다. 관상가의 영혼에는 많은 황량함과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보다 더 많은 기쁨, 의혹보다 더 많은 안전, 황량함보다 더 많은 평화가 항상 있습니다. 관상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추구했던 것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런 이유라면 이런 성취와 실체에 대한 이런 경험과 진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추구와 열망은 확실히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모순과 마주칩니다. 이 열망이 본질적으로 정당한 것이라면 그것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주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아직 관상의 참된 본질을 이해할 수 없거나 더욱이 그 요구를 이행할 수 없다면 관상을 열망하도록 격려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든지 성실하고 진지하고 진리에 대해 열려있는 한 관상을 열망하도록 하십시오. 관상에 대한 커다란 장애물은 엄격함과 편견입니다. 관상이 무엇인지 안다고 미리부터 생각하는 사람은 관상의 참된 본질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상이 고상하고 화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평범한 자아 안에 내재하고 계신 궁극적이며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드높여질 필요가 있으며 신비주의가 인간적 야심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을 포기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해방을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완고하며 자신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지혜를 확신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스러워하며 개인적 야망에 전념하기 때문에 관상은 우리 누구에게나 위험한 열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이런 죄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관상적 자유와 초월적 존재에 대해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도 모르게 저절로 우리 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 열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그 열망은 충족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관상적 소명을 깨닫는 방법입니다.


[제 13 장]


죄의 인식


영적 해방으로 향하는 첫 번째 걸음은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즉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작부터 막아서는 거대한 장애물을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그 장애물은 죄라고 불립니다. 엄청난 실체이고 엄청난 신비입니다. 죄의 실체와 신비는 모두 지금 죄에 완전히 빠져버린 듯이 보이는 인류에게는 다가가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죄악으로 가득해서 더 이상 회개를 하지 못하고 비교적 거슬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죄책감을 가지는 현대인의 절망적인 “무죄함”은 우리 시대의 가장 비통한 신비 중의 하나입니다.

종교인들조차 죄악의 개념과 죄의식의 개념을 완전히 혼동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죄악의 실체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큰 효과가 있습니다. 죄악은 내적이고 영적인 실체, 즉 진정한 악이며 사실 유일무이한 진정한 악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다른 모든 악이 부화되는 알입니다. 그리고 죄악이 없는 곳에서는 다른 명백한 악도 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죄악과 죄의식 사이의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죄의식은 악행에 대해 설명하도록 요구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느끼는 걱정인 외부로부터의 압박감입니다. 죄의식에 대한 걱정은 도덕적 단절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명령을 위반한 것에 대한 권위자의 책망을 내면화 할 때 그것은 우리 안에서 활성화 됩니다. 죄책감은 도덕적 악에 대한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현상학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다른 사람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유죄입니다. 그리고 내가 은밀히 그 사람의 판단에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때 나의 죄의식에 대한 걱정은 더 커집니다.

죄악에 대한 인식은 더 깊고 더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권위에 속하는 죄의식에 대한 인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자신 안에 있는 악에 대한 인식입니다. 나의 외부에 있는 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내 존재의 내밀한 법이며 동시에 내 안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인식은 나의 내밀한 존재,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깊고 의도적인 잘못에 대한 인식입니다. 죄악은 근본적인 악이며 영혼의 병입니다. 사실 심각한 죄악은 그것보다 더합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죽음입니다. 죄의식을 가지는 것은 도덕적으로뿐 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도덕적 죽음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라는 오히려 죄책감의 의미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영적인 죽음은 완전히 내적인 잘못으로 인해 진리로부터, 이기심으로 인해 사랑으로부터, 무에 대한 태도를 실체라고 주장함으로써 실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인식입니다. 죄의 인식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도덕적 규범과의 비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존재론적이고 직접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존재하는 악으로부터 직접 나타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내가 “나쁘다”고까지 말합니다. 내가 잘못된 존재이며 내 자신을 파괴시켰다고 말합니다. 죄악은 영적인 자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의 육신은 한번만 죽지만 영혼은 한 번 죽기 시작하면 계속 거듭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죄악 속에 있고 계속해서 죄악을 행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을 영원히 죽음이 반복되며 지속하는 지옥 속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합시다.)1)

그러므로 죄의식은 대부분의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그 공동체의 금기를 깨뜨릴 때 경험하도록 자신을 단련해왔던 나쁜 짓에 대한 욕정적인 느낌보다 훨씬 더 깊고 시급한 것입니다. 통속적인 신앙심을 가진 신자들에 대한 불미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피하면서 선한 기미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든 공허한 행동은 선한 의도를 상징하는 몸짓을 거듭하고 신앙심으로 적절히 얼굴을 찌푸리며 죄의식을 경감시킵니다. 이 모든 행위는 아주 충실하게 수행되고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낙관주의가 수반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의식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완전히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에 떨리는 마음도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자”들의 대다수가 수소폭탄이 의미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의 이론적인 항의만으로 수소폭탄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도 않았음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거의 믿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런 일은 이제 너무나 흔한 일이 되어서 아무도 더 이상 그런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상태는 전 인류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너무나 분명한 징조를 보여줍니다. 죄악은 점점 더 집단적인 것이 되어서 그 책임이 점점 더 모호하게 됩니다.

사회가 러시아에서나 히틀러의 독일에서처럼 점점 더 전체주의화 될수록 그 구성원들은 점점 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집단의 일원으로 행동한다고 느끼는 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악은 그들의 죄악을 떠맡은 공동체로부터 제거되어 “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끔찍한 재난이고 집단으로부터 분리될 조금의 조짐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걱정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세상이 흘러가는 방법이고 그런 세상에서 영혼과 영적인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이 소멸되지 않게 하고 적어도 자신만은 하느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책임감을 기르고 집단적 무책임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관상가의 소명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죄의식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 관상가의 소명의 몫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의 후예가 됩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규정된 예식으로 교정할 수 있는 전례 예식적 죄와는 다른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는 죄악의 실체를 매 순간마다 유다인들이 직면하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즐거운 소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적 설교에 불과한 것보다 더 어렵고 신비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정의와 자비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뜻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도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예레미야조차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때때로 현혹시키는 하느님과 모욕을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7-9)


관상가는 야훼의 종과 같이 “허약함을 잘 알고” 자신의 죄악뿐만 아니라 그가 사람들 중에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하는 모든 세상의 죄악까지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관상 생활은 필연적으로 우리 세대의 죄악에 따라 변화됩니다. 그 죄악들은 우리에게 순수한 무지의 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어둠의 구름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불시에 전 세계를 덮치는 영혼의 어둔 밤입니다. 아우슈비츠2), 다카우3), 솔로프키4)와 카라간다5)의 시대에 관상은 교부시대의 관상보다 더 어둡고 더 무서운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적인 빛의 길을 추구하려는 강한 충동이 죄악에 대한 알아채기 힘든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유혹이 우리 시대의 짐을 지는 것에 대한 노골적인 거절이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나누지 않기 위해서 비현실과 영적 환상으로 탈출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죄악입니다.

오늘날 관상 생활은 깊은 슬픔과 회개의 삶이어야 하지만,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등장인물들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순수하며 슬픔과 치유와 생명을 주는 참회의 생활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열을 지어 채찍질하는 환경을 반대했던 어두웠던 스페인 교회의 엘 그레코(El Greco)의 성화의 눈물과 같은 17세기 경건주의 배경에서의 세련되고 극적인 슬픔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깊은 가난은 단조로우며 그리 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할말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욥보다 더 가난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죄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처럼 우리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이 말을 잘 하지도 못합니다. 혼자 말을 할 때 우리는 욥의 친구들보다 말할 것이 훨씬 더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피골이 상접해서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간 유다인들의 철저한 파멸을 영적으로 공유할 수도 있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난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난은 영웅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암묵적 동의를 수반합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 부족하고 희생하려는 열망이 없는 것이 우리 시대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성에는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것에 대한 경이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은 묵시록에 나오는 경이로운 짐승과 같은 것이 아니면 더 이상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과 기도는 전혀 놀라운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옳습니다. 최고의 신비는 너무나 깊숙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 자체로 전혀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6)은 더욱 그렇습니다. 니체는 우리 세계를 설명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관상을 할 때 하느님이 종종 안 계신 듯이, 죽은 듯이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 관상의 진리는 이렇습니다. 오늘날 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부재함”으로 느끼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가장 신앙심이 깊어집니다. 우리는 어둠을 선호하며 우리 존재의 그 깊숙한 곳에서 이 공허함과 명백한 부재처럼 보이는 것을 존중합니다. 그분을 드러나게 하려는 노력이 헛수고라면 그렇게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無)를 있는 그대로 두십시오. 그때 그분께서 나타나십니다.














[제 14 장]


관상 생활의 문제들


1. 수도원의 관상적 양성


우리는 관상적 경험의 본질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내적 생활에서 잘못된 경향들, 거짓 신비주의나 강박관념으로 이끄는 잘못과 망상에 대해서도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죄의식과 도덕적 영적 악의 실체에 대한 인식은 관상생활에서 다양한 형태의 잘못과 기만에 대한 기초적인 보호막입니다. 죄의식과 노고와 고통과 자기희생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이해와 수용이 없다면 관상생활은 가치 없고 진실성도 없는 영적 방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1)라는 간단하면서 구체적인 성서 구절로 함축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경외하고 우리와 그분 사이에 장벽으로 서 있는 악의 신비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그 벽을 너머에 있는 관상적 지혜의 시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는 “선과 악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과 하느님의 성령을 분리시키는 그 벽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알지 못하면서 처음부터 선과 악을 넘어서기를 바라면 우리는 결코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혼란스럽고 분열된 선과 악의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실제로 악의 지배를 받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실제적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디에서 우리가 관상에 대한 적절한 환경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우리가 내적 생활의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침묵과 이탈에 전념할 수 있을까요? 가장 확실하게 떠오르는 대답은 수도 공동체나 관상 공동체가 아닐까요? 매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공동체는 아마도 관상을 지향하는 규율이 잡히고 잘 정돈된 생활 방법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에서 여러분은 관상가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적어도 그들이 어떻게 외적 존재를 정리하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 중 한명은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그 공동체는 일종의 하느님 현존의 “표상“입니다.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 공동체의 사랑과 기도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사시며 활동하시는 성령과 끊임없이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참입니다. 이것은 수도 생활의 이상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종종 어느 정도 실제로도 이행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법적으로 “관상 공동체”라고 불리는 공동체에 진정한 관상가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모범이 덕성을 북돋울지는 모르지만 잠재적인 관상가들에게 그것은 혼란을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지도는 실제적이고 건전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정한 관상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오래 전에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고찰하였습니다.

사실, 소위 관상 수도원에서 진정한 관상가의 양성에 대한 문제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주제에 관한 질문들에 손쉽고 간단한 답을 하는 사람들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수도원의 부흥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든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질적으로는 대부분 유럽에서 나타났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엄청난 성소가 있었고 수도원 설립의 숫자와 종류에서 주목할만한 증가가 있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모험을 하는 수도생활의 질에 대해서 이런 저런 식으로 어떤 것을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수도승들이 과거 암흑시대와 같이 그들의 사명을 다시 한번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고 현명한 척 예측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확신에 찬 희망을 지지해주는 증거는 그리 많지 않은 듯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새로운 암흑시대에 정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실망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의 상황은 로마시대 말기와 표면적으로만 비슷할 뿐이고 세상에서 수도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꽤나 다릅니다. 한 가지 예로 수도원은 더 이상 사회의 새롭고 기본적인 경제 단위가 아닙니다. 수도 공동체는 혼란의 시대를 헤치고 나갈 준비를 해야겠지만 전통적인 대 수도원은 더 이상 사회에 공헌하는 새롭고 독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효과적이고 활력 있고 유용한 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 발견된 것이 아닌 유물입니다. 쇄신은 다른 어디, 예를 들어 예수의 작은 형제회2)와 같은 작고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단체로부터 나옵니다.

수도 생활은 확실히 우리 현대 세계에서 그 자리와 역할이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서는 전례, 노동, 공부, 관상이라는 똑같이 본질적인 일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적용을 하는데 적합한 불멸의 효능을 지닌 영적 규범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도 단체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커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비실재적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20년쯤 지나면 할일이 너무 많아서 가장 필요한 일들이 잊혀지는 경향이 만연해서 그런 거대하고 복잡한 조직이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잠재적인 관상가들이 이 단체들의 규율을 애써서 지키도록 강요되어야만 할까요? 그 답은 ‘예’나 ‘아니요’로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하고 양성을 잘 받은 사람은 커다란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많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 생활 속에 이름 없이 묻혀서 단순한 관상을 하기에 용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양성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영혼에 대한 획일화처럼 보이는 커다란 공동체에서의 활동은 결국에는 해가 되는 속박의 효과를 줄 것입니다. 그것은 참되고 살아있는 영적 발전을 완전히 막아버릴 것입니다.

요즘의 수도 생활은 종종 입회를 원하는 젊은 성소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성소자는 결심이 되어 있어야하고 현명한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하고 어른다워야 하고 풍부한 교육을 받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주어집니다. 그런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사실이 종종 너무나 늦게 알려집니다. 오늘날의 보통 젊은이들이 수도 생활을 하기 전에 그의 지각과 감정과 상상력은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을 따라 교정되고 교육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도원의 문 앞에 서 있는 미성년자들은 훈련받고 억제될 필요가 있는 강한 열정을 가진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아니고 한꺼번에 모든 방면으로 뻗치는 막연한 정서적 공포와 열망을 가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들은 거짓 교양과 극단적 허무의 가엾은 복합체입니다. 그들은 관상 생활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생활에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도 합니다. 그들이 지난 20년간 겪어 왔던 그 과도한 자극을 끊임없이 받는 무위도식의 상태는 얼핏 보면 정신적 어려움의 정서적 좌절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게 합니다.

예컨대 오늘날 세속적 생활이 스며든 거짓 관상의 일반적 환경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TV 시청자의 생활은 일종의 관상의 모방입니다. 수동성, 무비판적 흡수, 수용성, 관성의 생활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완전히 일치되는 상태로 홀릴 때까지 불가사의한 매력에 대해 점진적으로 굴복하는 생활입니다. 이 모방의 문제점은 그것이 관상과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진정한 관상은 바로 물질적이고 현세적 수준의 감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로잡는 것에 대한 가장 능동적이고 비타협적인 이탈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관상가는 다소간 동물적인 본성을 지닌 사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그의 욕구에 호소하는 모든 것과의 엄청난 싸움 이후에만 수동성에 도달합니다. 그가 도달한 침묵이 맑고 영적이고 자유로 가득한 경우에만 그는 수용적이고 침묵적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자유로운 생활의 정점입니다. 다른 대용품은 절망 상태의 지성적 정서적 굴종입니다.

어떤 수도규칙서에도 수도원에서 TV 중독자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의 당혹감은 그의 내적 생활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것과 거의 같을 것입니다. 첫눈에 그는 아주 온순하고 낙관적이고 융통성이 있게 보입니다. 그는 주의를 기울이라는 신호에 희망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는 그의 면전에서 언급되는 말들을 경청하고 심지어 후일을 위해 마음에 간직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그는 현명합니다. 그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시작될 것입니다. 서원을 하고 나서일지도 모릅니다. 수도자의 양성은 단 하나의 중요한 비밀, 즉 텔레비전을 켜는 마법의 스위치가 있는 위치를 발견하는 법을 점진적으로 배우는 교묘한 게임입니다.

그런 사람은 관상 생활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생활에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활은 스스로 활동하고 일하고 생각하며 허물을 벗고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활도 관상 생활보다 더 활동적이고 더 강한 양성과 외적 지원에의 의존에 대해 냉혹한 이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2. 관상과 기술


오늘날 관상 생활의 문제는 더 높은 영적 발전을 위한 기초로써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연스러운 영적 문화적 토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지”에 대해 말 한 것은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덮개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와는 반대로 쟈크 마리탱(Jacques Maritain)이 “인식의 단계”에서 명확히 말한 것과 같이 관상에서 사고를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접근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개념적 지식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 종류의 “무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것은 관상에 대해 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망각이고 초월인데 이것은 관상에 적합한 것입니다. 이 자체는 docta ignorantia(무지의 지), 즉 “무지”라고 불립니다. 그러므로 관상 생활은 대개 훌륭한 문화적 토대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의 가장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훈련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럽고 수동적인 별로 관계가 없는 실제적 지식으로 뭉쳐진 사람들이며 이름, 날짜, 사실과 다양한 물질적 변화 과정의 “방법”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모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사용할 방법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지식은 삶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은 그들의 존재 속으로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그들의 일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 시대와 아직도 존재하는 원시적 사회에서 사람은 본성적으로 관상에 적합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비록 교육을 충분히 받지는 않았지만 예술적이고 전문적인 전통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예술가”이며 “영적인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과 문화에 의해 양성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쓰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할 수 있지만 반드시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매우 중요하고 생생한 종류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그들의 삶으로 스며듭니다. 그들은 조화로운 마음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균형과 단순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변화와 기계에 의해 소외되고 노예화되는 세상에서는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관상가가 될 준비가 아주 잘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로 과거에는 모든 사회가 아주 자연스럽게 영적이고 관상적이기까지 한 생활이 익숙한 사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은수처에 가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현존과 영원한 실재에 초점 맞춘 삶에 전념했습니다.

그런 문화가 존재했었고 지금도 몇몇 장소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화는 사라질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쓰라림 없이 그리고 과거에 대한 쓸모없는 향수 없이 직면해야만 합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사람도 거기에 따라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의 본성과 자유와 인격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결과적으로 관상이라는 그 최고의 행위에서 그의 사랑과 자유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시대는 변하고 있고 현대인을 교육할 때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이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실로, 오늘날 관상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의 타고난 능력만큼 무관심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현대 어린이는 의식적인 생활의 첫걸음에 영성에 대한 본성적이고 자연적인 표징을 보여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상상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며 실체에 응답하는 단순하고 독특한 신선함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사려 깊은 침묵과 집중의 시간까지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특성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두려움과 걱정과 수행해야하는 규제들로 인해 재빨리 파괴됩니다. 아이들은 장난감 총을 휘두르고 텔레비전의 등장인물과 같은 옷을 입고 고함을 지르며 성급하고 불성실한 작은 괴물이 됩니다. 아이들의 머리는 공허한 구호와 노래와 소음과 폭발적인 감정과 통계와 상표 이름과 협박과 야비함과 진부한 생각들로 가득합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말로 표현하는 것을 배우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고 주장하는 것을 배우고 광고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배우고 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요컨대 ‘연대감’ 속에서 자신과 같은 다른 아이들을 따르며 빈 머리로 살아가는 것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육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육은 진정한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진정한 삶은 현대인들이 결코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의 의식적인 삶은 추상적 관념, 관능적 환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진부한 말들, 그리고 탐정이나 판매원의 동물적 교활함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안에 있는 잠재적으로 가치 있고 절대로 필요한 모든 것은 잠재의식으로 쫓겨났습니다. 섹스는 더 이상 억제된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그의 창조성과 영성과 관상적 독립심이 의심의 여지없이 과학 기술의 악령에 자신을 팔아넘기거나 타협하는 초자아에 의해 냉혹하게 억압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향은 과거에 마술사, 주술사, 점성가, 연금술사, 그리고 마녀에게도 이었음을 주목합시다. 이들은 또한 악마와 파우스트적 계약을 하고 그들의 창조적 자유와 관상적 순결을 권세의 제단에 제물로 바치는 영적 괴물입니다. 이 사람들은 현대 기술 관료들의 진정한 선조들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사회가 건강했기 때문에 파우스트의 계약은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그것은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파우스트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영혼의 존재가 부정된다 하여도 “영혼”에는 상당히 병적인 흥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가들은 “인간 영혼의 기술자”라고 불리며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거만한 파우스트, 가장 오만한 무신론자 중의 한명으로까지 불립니다. 현대인은 그가 조종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안에 있는 것으로써 영혼에 흥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그가 힘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붙잡아 도구로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영적 ‘핸들“입니다. 이것은 관상적 접근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관상가는 모든 외적 통제로부터 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물질적이고 관능적이며 영적이기까지 한 욕망으로부터 정화되고 이탈하며 성령의 진리와 창조적 자유에 그 영혼을 내어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유롭게 하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자유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최고의 자유에 대한 증거이며 은밀히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알게 해 줄 수 있으며 그 열망에 불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적 관료에 대한 교육은 관상가에게 요구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가슴에는 놀라운 관상적 유혹이 있습니다. 그 유혹은 그가 관상적 경험을 권능의 근원으로써 이해할 때 쉽게 일어납니다.

어떤 것으로 대중적 종교는 현대인들을 유혹하려고 할까요? 영적 능력에 대한 약속입니다. 종교는 기술보다 우월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기술자이신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 뒤에서 관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바벨 국립 은행의 꼭대기 층의 사무실에 계신 지배자와 친해집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성공작으로 만드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영적 능력이며 일종의 불사불멸하며 신비로운 완전성인 관상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자신의 개인적 삶에서는 절대로 오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내적 공간으로 가는 문을 엽니다. 그 곳에서는 여러분이 잘못될 수 없으며 누구도 여러분에게서 결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부러운 정신분열증적 능력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특징상 영적인 것이 아니라 마법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관상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기술자가 여러분을 잡아서 “정신”을 통해 여러분을 지배하려고 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할 뿐입니다.


3. 관상 생활에 대한 준비


평범한 현대인들에게 관상의 문제는 준비의 문제입니다. 우리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정반대의 관상가, 즉 기술자나 사업의 신비가가 되기 쉽습니다. 그의 관상은 여러분이 입증된 최신 방법으로 일을 한다면 빠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탁월한 가치가 있는 실용적인 것입니다. 여기 정말로 여러분이 관상적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발견하는데 도움을 줄 시험장치가 될 심리적 자기분석이 들어옵니다. 여하튼 여러분은 자신과 고정관념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분석적 심리학은 내적 생활의 표면적인 것들에 대해 할 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술이 하나 늘었다고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대단히 잘못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비극적인 혼란을 가중시킬 뿐일 것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 위에서 말한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관상 생활이 요구하는 적합한 준비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시골에서 살며 자연과 계절의 리듬에 맞춰 사는 조용한 삶입니다. 그것은 취미삼아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필요에 진정으로 관련된 예술과 기술을 익히는 육체노동이 있는 삶입니다. 그것은 땅을 경작하고 농장 동물을 돌보고 정원을 가꾸는 삶입니다. 그것은 광범위하고 순수한 문학이고 음악이며 미술의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삶’의 (티티안3)과 프락시텔레스4)와 잭슨 폴록5)에 대한 가벼운 소개)의 정신이 아니라 시나 그림 등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한 순수하고 창조적인 진가를 이해하는 삶입니다. 진지한 친교와 같은 것이 있고 텔레비전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삶입니다. 이런 것들은 시골에서의 삶만이 사람들이 관상을 준비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훈련의 형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관상 생활을 준비시킨다고 말할 때 반드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수도원들이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고등학교나 대학을 막 졸업한 준비되지 않은 지원자를 곧바로 수도 생활의 조직화된 일상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십중팔구는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수련을 받다가 깊은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시적인 손님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련의 목적이 아닙니다.

커다란 수도원은 인간미가 없이 거대한 크기를 가졌으며 바쁘고 복잡하며 구성원 개개인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되는 경향이 있는 조직으로써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관상적 기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중세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수도 생활이 신학적으로는 중세적 양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속도는 종종 공장이나 사업체의 속도입니다. 관상 생활에서 요구하는 겉보기에 막연한 휴식과 아무 생각 없는 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물론 어떤 문화는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전례적, 역사적, 영성적, 신학적, 신비적으로 꽤나 깊은 문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도서관은 필연적으로 대학교의 도서관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고 어떤 수도승들은 연구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과 같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제출할 논문은 없어도 최소한 과제물로 바쁩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필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관상 생활의 속도는 아닙니다. 당연히 전례가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전례는 성가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노래를 부르던 부르지 않던 공동체의 모든 수도승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하고 걱정스럽고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가장 커다란 과제일 것입니다. 물론 육체노동이 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고 노동자들의 일입니다. 개인적인 책임은 전혀 없고 집단적 책임에 묻어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성서 공부도 하지만 그것은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져야 할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너무 자주 고고학과 언어학의 지엽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이 모든 것을 연민 이상의 마음으로 진지하고 확실히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매우 익숙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난이나 불평이 아닙니다. 그런 발전은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다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수도원은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커다란 수도원은 영적으로 성숙하고 이미 관상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수도원은 그들에게 안전하고 경건하고 때때로 고요하기까지 한 질서가 잡혀있거나 적어도 규칙적인 생활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름 없이 주변 환경 속에서 만족하며 살수 있고 진정한 관상가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런 수도원은 엄밀한 의미에서 관상가로 불리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종의 금욕주의를 가르쳐주고 그 실천을 상기시켜줄 “종교적 규율들”로 가득한 엄격하고 조직화된 공동체 생활을 필요로 합니다. 이 사람들은 “관상 수도원”에 살고 있고 그 규율을 따르기 때문에 관상가로 불리게 되는 교회법적 관상가일 뿐입니다. 그들은 더 내면적이고 은밀한 것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고도 꽤나 만족합니다. “어둠 속에 계신 하느님에 대한 유사 경험적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위험스럽고 애매한 주장은 그들의 마음을 거의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지의 구름” 없이도 아주 잘 지낼 수 있으며 그들에게 수치심만 느끼게 해줄 “어둠 속의 빛”인 하느님의 빛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하늘나라에 계시고 그분께 드리는 전례는 지상에서 거행됩니다. 큰소리로 노래하고 전례 규범을 준수하며 공산주의자들을 벌해 주십사 하루에 일곱 번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통 “관상” 공동체에서 더 우세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커다란 수도 공동체는 참된 관상이건 단지 규정상 관상이건 이미 “관상”에 대한 준비가 된 성숙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유익하고 의미 있는 생활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회들이 미성숙한 지원자를 준비시켜 그들이 관상적 수련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양성을 해서 자연스럽게 성숙하게 해 주려면, 수도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여유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기본적인 종교적 양성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문화적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적 훈련을 위해서도 지원자들을 위한 조용하고 분리된 공동체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 훈련에 관한 가장 첫 번째 과정은 물론 세속 대학에서 훈련받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어야만 합니다. 거기에서 학생은 그를 위해 이미 연구되고 정리된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 지원자는 비록 필요한 라틴어를 배워야만 할지라도 어떤 사실이나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전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의 경험을 하게 되고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그 경험들과 자신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혼자 생각하며 고독하게 있는 것을 배우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배우고 무언가 만드는 일을 배울 것입니다.

이런 것은 수련원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련소의 규칙과 훈련에서는 단식, 노동, 침묵, 묵상, 기도와 전례가 중요시됩니다. 수련자들은 비판적인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적절한 긴장감을 가지고 그것을 수행합니다. 수련자는 “시험에 든” 존재입니다. 그러나 수련자는 우선 편안하고 그리 힘들지 않은 분위기에서 이런 과제들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든 조건에서 그것을 수행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고 존재 전체로 실체를 경험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정상적이고 단순하게 감각들을 이용하여 자연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기쁨을 가지기 전에 감각을 “억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수련자는 우선 단순한 식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단식 날 배고픔의 해방감과 여유롭게 비교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수련자는 분별 있는 대화의 즐거움을 침묵 속에서 혼자 생각을 하며 있는 것에 대한 똑같은 즐거움과 비교해야만 합니다. 수련자는 따분한 규율 준수와 순명으로 소용없는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행과 생산적인 육체노동에서 만족하는 것도 알아야만 합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종류의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양성을 받았다면 그들은 수도원의 규율에 대한 그렇게 많은 이상하고 왜곡된 해석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넓은 시각을 가지고 인간 문제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는 장상이 자신의 수도승들에게 가장 이익이 되도록 삶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작은 수도 공동체에서는 지원자가 구성원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양성이 그 공동체의 긴 지원기 동안 수행될 수 있습니다. 커다란 공동체에서는 비록 (기존의 공동체원) 한 두 명은 지원자의 이익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무언가 해주려고 하겠지만, 지원자는 결국 그 획일적 영성의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독단성에 휩쓸릴 것입니다.

관상가를 양성하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세워진 작은 갈멜 공동체를 공부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우선, 그 공동체들은 항상 변함없이 작고 입회가 어렵습니다. 20 명은 너무 많습니다. 22 명은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규율은 엄하고 잘 지켜졌습니다. 그러나 규율 준수에 대한 이해는 항상 포용력이 있고 이성적이었습니다. 장상은 관리 이상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는 참회, 침묵, 고독, 단식과 노동 등과 함께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를 잊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기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면 성녀 데레사는 전자를 택했습니다. 이것은 ‘창립사’의 제 4장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중에 과장과 망상으로 이끌린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현실과 계속 접촉하기 위해서 어떻게 영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마음을 돌리게 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이끌던 갈멜 공동체의 휴식시간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성녀는 노래하고 춤추고 류트(기타와 비슷한 중세의 현악기)를 연주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묵상을 하기 위해서 그의 수도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갔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계신 하느님에 대해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지성과 인간적 조화에 많은 가치를 두어서 갈멜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훌륭한 신학자가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데 완화된 규칙이 도움이 된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4. 세상에서의 관상 생활

 

우리는 수도원에서 관상 생활의 문제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날 수도 생활에서 융통성 없는 획일화된 특징이 자라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반대편 극단에는 제도화된 조직의 지원을 받지 않고, 세속 생활의 압력과 혼란에 대해 방어도 하지 못하는 “세상에서의” 내적 생활을 영위하려는 고립된 평신도가 있습니다.

과거의 영성 생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작가는 “세상”을 그들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 세상과 하느님과의 대립은 전통적으로 즐겁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한 생활에 대한 유혹과 희생, 청빈,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로 이끄는 단호한 요구 사이의 줄다리기 형태를 취합니다. 오늘날 그 상황은 변했습니다. 유혹은 달라졌습니다. 덜 건전해지고 훨씬 더 불쾌한 것입니다.

더 이른 시기에 진부한 표현으로 “세상의 신봉자”라고 불렸던 사람들조차 전제적 지배자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만족감을 잃어버렸습니다. 관상 생활에 필수적인 고독과 침묵은 부자들만 이따금씩 손에 넣을 수 있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 되었습니다. 꿈에서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평화는 안전에 대해 절망적인 싸움을 하며 사는 사람의 깨어있는 시간을 괴롭힙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관상 수도승은 속물의 질투의 대상이 된 듯 합니다. 수도승은 희생을 하고 지켜야할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규칙과 가혹한 요구와 냉혹한 압력은 그것보다 분명히 훨씬 더 힘겹습니다. 세상은 더욱 더 많은 요구를 할 뿐만 아니라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소수의 특권을 가진 사람만 갈 수 있는 섬과 산과 사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조차도 수도원처럼 점점 더 급속히 침범당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관상 생활의 커다란 문제 중 하나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원 외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세속 생활의 압력과 불안과 위험으로부터 달아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압력들과 필수불가결하게 관련이 있는 편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수도 소명의 역설은 세상의 다툼으로부터 달아나고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평화에 대한 열망의 역설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붙잡는 것은 그 다툼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항상 가장 다툼이 많은 곳에 의무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영혼이 지치고 실망하는 현실을 계속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정말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면 안 되는 것처럼 세속적인 삶의 투쟁을 포기할 때 죄의식을 느낍니다. 세속적 삶의 투쟁과 모순이 분주한 수도원에 적용되는 경우에 그것은 어느 정도 기적적으로 갑자기 세속적이기를 그치고 종교적이 됩니다. 사업과 세속적 선입견은 이제 “십자가”가 되고 그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불신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공동체 생활은 세속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수도원 밖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도 이와 똑같은 투쟁에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관상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수도원에 있던지 세속에 있던지 두 가지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첫째로 그는 “세상”과의 접촉과 세속에 대한 종속을 줄임으로써 가능한 한 그의 삶에서 갈등과 좌절을 줄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즐거움, 편안함, 오락, 명성, 성공에 대한 필요성을 줄이고 진정한 영적 가난과 이탈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그는 소음, 동요, 복잡함, 시간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주변 언제 어디서든지, 심지어 수도원에까지, 존재하는 완전히 세속적인 생각과의 끊임없는 접촉 등 여전히 남아 있는 피할 수 없는 갈등들을 참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렇게 수도원에서조차 관상 생활을 준비하는 것이 어렵다면 바깥세상에서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요? 이런 이유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관상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작은 기적들을 청할 자격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기적들만이 관상 생활을 가능하게 할 상황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가장 축복 받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조차도 오늘날 도시 생활의 보통 조건들은 영성 생활에 너무나 해로워서 그들이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내적 생활이라도 영위하려면 계속해서 끝없는 싸움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혼자 남겨지면 예외적인 사람만이 그 영성이 다른 것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의 정신에 그를 종속시키며 성령께 둔감하게 만드는 집단적 압력이나 명령으로부터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충분히 깊은 수준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영성 생활에 관심이 있는 평신도 집단은 기초적인 관상적 영성인 것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서 양성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전례와 성서 공부와 관계가 있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운동은 이런 방향에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관상 수도원들이 개인 피정자를 받아들기만 하고 그들에게 자주 영성체를 하고 십자가의 길을 하도록 장려하는데 만족하면서도 서로 지지해주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시토회나 카르투시안회와 연결된 일종의 관상적 제 3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조직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는 정말로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런 집단은 조직화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관상에 관계된 사제의 지도와 격려 하에서 그들 자신을 양성할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이 집단들은 구성원들에게 책을 제공해 주거나 모임을 주선하거나 지도를 해주거나 며칠 동안 묵상과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시골의 조용한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정도의 독창성과 솔선수범이 장려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평신도는 종종 성직자의 주도권에 너무 수동적으로 의존하고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일상적인 훈련을 하는 전통적인 모임과 다른 영적 피정의 형태는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따라와서 관상 생활을 떠먹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력한 관성을 포기하고 상상력을 청하고 주님께 여러분의 창조적 자유를 깨워달라고 청하고 다음의 것들을 고려하는 것이 낫습니다.


1.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며 여러분이 더 많이 생각할 시간이 있는 시골이나 작은 마을로 이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가난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성 생활에는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 희생은 여러분의 대부분의 걱정거리의 근원인 냉혹한 싸움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진적으로 사람을 고립시키고 정상 궤도를 벗어나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산림 경비대나 등대지기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생을 야간 경비원으로 보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합당합니다. 그런데 농사는 어떻습니까?


2. 세상은 조용한 시간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자신을 위해서 하루 중 조용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아침 시간이 이런 시간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도시에서 수 백 마일 떨어져 있을 수 없을 때조차도 오전 4시나 5시경에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집에 있으면서 고독의 평화를 맛볼 것입니다. 게다가 여명은 본래 평화롭고 신비스럽고 관상적인 시간입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숨을 고르고 경이롭게 동쪽 하늘을 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며 따라서 영성 생활에 중요한 시간입니다. 영성 생활은 끊임없는 내적 쇄신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녁 미사가 더 장중하고 장엄해도 이른 시간의 미사에 참례하는 것 더 바람직합니다. 이른 시간의 미사 때에 사물은 더 평온하고 더 소박하고 더 꾸밈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찍 일터에 가기 위해서 이른 시간의 미사에 참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과 진심으로 더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그들 가운데 영적으로 현존하심은 그들의 미사를 더 관상적인 것으로 만드십니다.


3. 주일을 본래 교회의 전통에 따라 관상하는 날로 따로 생각해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청교도적 관습은 주일을 절대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특징을 가지는 소극적인 의미의 “안식일”처럼 보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필연적인 반작용은 주일을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쉬는 날로 만드는 적법하지만 다소간 무의미한 휴식을 강조합니다. 주일 오전 내내 잠을 잔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육체적 휴식보다 더 중요한 휴식의 날에 대한 의미를 놓치는 것입니다. 주일은 일하지 않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고 상점과 은행과 사무실이 문을 닫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에 관상의 날입니다. 주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느님에 대해 생각해야만 하는 주 중의 다른 6일과 구별된 하루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성한 영원무궁함으로부터 나온 강렬한 빛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속적” 시간을 중단시키기 때문에 “주님의 날”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쉬고 월요일에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혜를 모으고 다른 6일을 가득 채우는 세속적 일의 상대적 무의미함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이해력을 넘어서는 평화에 대한 만족을 맛보기 위해서 일을 멈추고 주일로 달려갑니다. 주일은 우리의 일이 올바르게 방향 지어졌다면 주간 내내 스며들 평화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주일은 교회법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사에 참례해야한다고 명령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영적으로 주일을 기념하고 그 표면적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빛, 부활의 빛에 마음을 열기 때문에 관상적인 날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사랑과 신앙 안에서 자라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조금 더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겠지만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면 주일은 빛이 주어지는 은총의 날, 빛의 날이 됩니다. 이 명백한 의무에 대한 단순한 이행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깨닫는 것은 일종의 관상의 길에 첫 걸음을 내딛은 지친 평신도에게 확실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우리가 관상의 빛을 찾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사실에 의해 우리는 일종의 영적 훈련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것은 봉쇄구역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속적 삶의 모든 의무와 노고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 봉쇄 수도승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세상에 사는 평신도 관상가의 첫 번째 희생은 그가 수도승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결과적으로 그의 기도 생활이 초라하고 빈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활동적인 덕과 선행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관상적’ 삶에 커다란 역할을 하며 봉쇄 구역 밖의 기도하는 사람은 소위 “숨은 관상가”와 매우 흡사할 것입니다. 더 분명하고 높은 경험에 대한 갈증으로 고통 받아서 그가 억지로 그 경험을 하려고 하고 부자연스럽고 무분별한 노력으로 “기도 수준”을 높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해가 될 뿐입니다. 세속에 있는 관상가의 훈련은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의무, 가족 구성원이나 직장의 일원이나 시민으로써의 의무에 대한 충실함의 훈련입니다. 이런 의무나 그 훈련은 커다란 희생을 요구합니다. 사실 세속에 있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봉쇄 구역에서 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을 강요할 것입니다. 여하튼 그들의 관상 생활은 그들의 이해력과 의무의 깊이에 의해 깊어지고 고양될 것입니다. 단지 체제에 순응하거나 말뿐인 신앙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내적 의미를 간파해야만 하고 그래야만 하는 중요성을 충분히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행을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서 참되고 개인적인 결정으로 이 의무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단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계신 하느님의 성령의 작용으로부터 오며 그의 가장 작은 선행을 완전히 영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게 되는 “새로운 것”, 그리스도와 같은 것으로 가득 차게 해야만 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순수한 의도”를 말로 표현하는 문제 이상의 것입니다.


5. 이 결과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생활은 본질적으로 그의 관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은 결혼에 의해서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은 결혼에 의해서이며 그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결혼 생활에서입니다. 그들의 결혼은 삶의 모든 부분에 은총을 발하는 신성한 중심점이며 그 결과 그들의 일과 휴식과 희생, 그리고 산만함까지도 어느 정도 관상적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들의 결혼입니다. 결혼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질서 지워지고 그리스도께 집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그리스도인, 특히 (일반) 부부들까지도 사랑이 자신의 관상으로 들어가 사실상 이것이 그의 관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혼인의 사랑으로 일치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일치하는 신비를 나타내는 신성하고 상징적인 행위이며 그 본질입니다. 이 신비는 관상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부부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열망과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열망을 육체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한 사람의 필요성을 맹목적이며 단순하고 (다소간) 더듬거리며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사람의 분열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다른 자아와의 일치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어린아이 같은 행동입니다. 그리스 교부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실제로 한 육체안의 두 사람이었다고, 즉 그들은 하나의 단일한 존재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된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나서 사람은 둘로 나뉘어졌고 그에 따라 성적인 사랑에 의해 그의 잃어버린 단일성을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열망은 원죄에 의해 항상 좌절되었습니다. 성적인 사랑의 결과는 완전하지 않고 완성된 것이 아닌 허약하고 유배당하고 불완전한 또 다른 아담과 하와를 낳는 것일 뿐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라나서 어른이 되고 완전함에 대한 동경에 마음을 빼앗겨 결혼하고 사랑과 절망의 어두운 신비를 계속 반복하고 불완전과 좌절의 세상에 새로운 존재를 낳고 결국 미완성의 존재로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아담의 후손들의 공허함과 절망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본성과 결혼하셨고 그분 안에서, 그분의 위격 안에서 사람과 하느님을 일치시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태어난 목적인 완전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더 이상 결혼을 하거나 결혼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 안에서 사랑의 완전함으로 모두 하나가 됩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거룩한 동정생활(Sacra Virginitas)"에서 관상에 이르는 순수한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동정 상태는 부부의 사랑이 불완전하게나마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본질에 달려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관상은 동정 상태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론상 그것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동정 상태가 더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이 사실상 더 낮고 더 세속적일지라도 계몽된 평신도는 그 위대한 신비에 더 구체적이고 민감하게 접근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나름대로 독특하게 참여하는 슬픔과 환희, 창피와 기쁨, 승리와 죽음의 은밀한 그 신비 속에서 잃어버린 일치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평신도 그리스도인에게 관상은 동정 수도자에게 적절한 훈련과 몸가짐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결혼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자신의 본질적인 존엄성을 볼 수 없도록 할 뿐인 동정 수도자나 성직자의 영성에 너무 많이 영향을 받지 않게 해야만 합니다. 사실 동정 수도자나 성직자의 관점에서 배타적으로 영성 생활을 바라보는 책들이 너무나 많고, 그런 불필요한 다양함이 실제로 무익한 영성 서적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입니다. 동시에 이 무익한 책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충분하고 건전하게 구체화할 때 가장 위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혼한 그리스도인의 내적 생활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질서정연하고 평화롭고 어느 정도 차분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옳을지라도 그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결혼의 신비에 중심을 두는 관상적 영성입니다. 그런 영성의 발전은 매우 필요하고 아주 바람직합니다.










[제 15 장]


전망과 결론


“세속에서의” 관상 생활의 가장 중요한 발전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모든 노동 생활과 청빈을 관상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주위에 있는 평신도들처럼 사는 사람들의 작은 그룹의 성장입니다. 관상 생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전형적인 새로운 모습인 예수의 작은 형제들의 우애회의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작은 형제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수도회를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수도복도 없습니다. 그들은 담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에 살지 않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사제이지만, 신자들 사이에서 외적 사도직을 수행하지 않고 본당을 맡지도 않고 포교도 하지 않습니다. 사제와 수사들은 보통 시민들처럼 옷을 입고 그들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노동 기회를 이용하여 공장이나 농장 같은 평범한 일터에서 일합니다. 그들은 갈릴레아 조그만 마을, 나자렛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노동자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숨겨진 삶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작은 형제들의 우애회는 도시의 가난한 지역의 집이나 서민 아파트나 가난에 찌든 시골 지역의 오두막에서 삽니다. 그들의 집과 다른 노동자의 집을 구별하는 유일한 것은 그곳에 제대와 감실이 있고 성체가 모셔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집에 있는 이 제대는 우애회의 관상 생활의 중심입니다. 미사는 보통 작은 형제들뿐인 10명에서 12명의 신자들로 매일 봉헌됩니다. 성체는 이 관상 생활의 살아있는 심장입니다. 형제들은 낮이나 밤이나 가능한 한 많이 그들의 자유시간을 감실 앞에서 조배하면서 보냅니다. 그들의 총장 르네 보왈룸(Rene Voillaume) 신부가 지적했듯이 당연히 그들은 관상에서도 가난을 기대하고 충분히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들의 삶은 모든 점에서 가난한 삶입니다. 그들의 기도도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분심, 피로, 무력, 분별 있는 열정의 부족, 방향감의 상실, 나약과 명백한 실패까지도 가난한 사람의 그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주제에 관한 몇 마디 말을 르네 보왈룸의 저술로부터 인용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숨겨진 관상에 대해 위에서 말한 것에 빛을 주며 작업 속도나 현대의 삶에서의 여러 의무들의 압력 때문에 기도 생활이 심각하게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보왈룸 신부는 묻습니다.


노동 생활에서 진정한 기도에 필수적인 조건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어떻게 그것에 몰두하도록 노력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여러분의 끊임없는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은 때때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아주 진지하게 그 문제를 직면하십시오. 나 역시 때때로 낯설고 아주 위험하고 좁은 길의 출발점에 서 있는 듯이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길로 몰아댈 권리가 있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가장 가파른 길은 종종 가장 좋고 빠른 길입니다. 여행자는 여정에서 빈둥거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기도 시간이 되면 우리는 더 자주 묵상을 할 수 없고 정말로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나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야만하는 방법은 가능한 한 우리의 모든 존재와 함께 그분께 가는 것입니다.우리는 우리 안의 살아있는 신앙, 살아있는 희망, 그리고 살아있는 사랑에 의해 그분께 다가갑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덕행들이 우리가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민감하고 위로하는 느낌에 결코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어 드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자신의 대부분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의 씨앗, pp 187-189)


여기에는 정적주의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무미건조하고 엄격하고 어려운 기도 방법입니다. 그것은 즐거움과 돈과 오락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 사막의 고독과 건조함을 초래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사람의 죄를 보상하며 인간 사회에 숨어계신 그리스도가 계속 존재하도록 하는 속죄의 기도이며 침묵의 소박한 기도입니다. 샤를 드 푸코1)의 제자들은 특별한 사목적 직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논쟁하지도 않고 설득시키려고 하지도 않고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않고 뜯어 고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람들과 함께 있고 사람들의 삶과 가난과 고통과 문제와 이상을 나누려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이 존재하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십니다. 그분이 존재하시는 곳에서 그분은 행동하십니다. 그들의 존재는 활기차고 역동적이 됩니다. 그것은 빵 안에 숨어 있는 누룩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관상적 견해입니다. 자신과 그의 모든 야망과 세속적 열망을 완전히 희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절히 이해되면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단순함입니다.

20세기 초에 프랑스 장교 출신이며 탐험가였고 세속적 삶에서 회심하여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갔고 다시 사하라 사막의 은수자로 살기 위해 퇴회했던 샤를 드 푸코에게서 작은 형제들의 이상이 발견되고 실현되었습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었을 때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의 금욕 생활과 기도 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도회를 떠난 후, 많은 이들은 분명히 그의 더 많은 발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관상 수도회들은 샤를 드 푸코에게 당황했고 그를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푸코가 반항아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시성식은 아프리카 선교사들인 백의의 사제들에 의해 로마에서 추진되고 있습니다.

전문적이고 표준적인 관상가 집단 중에는 샤를 드 푸코를 따르는 삶이 “관상적”이 아니라는 심각한 불신이 있습니다. 그는 수도원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인된 관례를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이상한 개인적 영감의 따랐습니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그가 생각한 투아레그족2)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들과 이야기했고 그들의 언어를 공부했고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요컨대 그의 “관상” 생활의 방식은 단지 사막으로 들어가 실제적인 목적으로 투아레그가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방식이 얼핏 혼란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관상 생활에 대한 너무 좁고 완고한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관상 생활이 아닌 것을 너무 강조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의 이탈, 침묵, 육체적 고독, 봉쇄구역, 본당 사목을 하지 않음 등 일련의 규정을 만들고 이 규정들이 포함되지 않는 삶은 관상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 모든 규정들이 이상적으로 내적 생활과 관상 생활의 발전을 장려한다는 것은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규정들을 책에 적힌 그대로 금과옥조의 율법처럼 여깁니다. 확실히 가난하고 원시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고도로 발달되고 복잡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떠나는 것은 문명화된 사회에 남아서 부유하고 안락하고 기계화되고 많은 존경을 받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완전히 “세상”을 떠나는 것이 분명합니다.

고향의 수도원에 있는 수도승들이 “수도자”인데 비하면 투아레그족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민간인”이거나 “세속인”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투아레그족의 거주지는 수도원의 봉쇄구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멈추어서 수도 생활과 관상 생활의 선구자였던 최초의 수도승들인 이집트 사막 교부들이 평신도였으며 더욱이 투아레그족과 매우 닮았으며 샤를 드 푸코가 호가3)에서 보냈던 것과 거의 같은 종류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성급한 판단을 어느 정도 수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샤를 드 푸코의 이상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가장 깊고 참된 그리스도교 관상을 동방의 신비주의와 접촉하게 해준 얼마 전에 작고한 몽샤닝 신부4)와 같은 뛰어난 영성의 이상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디보다 여기에서 크고 “공인된” 관상 기관과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작고 생기 넘치고 독창적인 관상 집단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관상 생활은 특징적인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19세기 말에 갑자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옛 생각이 거의 모든 곳에서 우세할지라도) 어떻게 그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는지 살펴보면 놀라게 됩니다. 선교 지역의 최초의 관상 수도원은 어이없게도 “식민지식” 이었습니다. 아무도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럽에 있는 크고 번창하는 “모원”으로부터 새로 정착해야 하는 외국문화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수도승 무리가 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이교도의 어둠” 한가운데에 “기도의 발전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이교도”가 영적 교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물론 그것이 “완전히 몽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불교는 해탈에서 자신을 버리려고 하고 요기는 자기최면에 의해 무아경에 이르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너무 품위가 없고 불합리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무지한 마음에 하느님의 빛이 비치기를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거대하고 공을 들인 유럽에 있는 모원의 모방건물을 건설했습니다. 사람들은 생활, 관습, 의복, 가구 등에 대해 유럽식 방식을 조심스럽게 유지했고 모원으로부터 배워온 모든 사소한 규율과 규칙까지도 아주 정확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에 있는 관상 수도원들은 유럽의 커다란 모원의 선교 지부였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원주민 성소자들은 수도승이 되었을 때 유럽 사람들처럼 되었습니다. 수도생활 자체의 성실과 효능이 참된 영적 친교를 초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수도원들은 참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충분한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도원들은 미움 받는 식민지 지배세력이 그 나라에서 쫓겨나면 즉시 사라질 운명이었을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몽샤닝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남부 인디아로 간 프랑스 교구 사제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힌두 승려들의 일상적인 의복을 입고 유럽식의 의자나 탁자나 가구도 들여놓지 않고 그리스도교 암자, 단순한 오두막의 수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매일의 기도 시간도 유럽식에 바탕을 두지 않고 완전히 동양 관습에 따랐습니다. 몽샤닝 신부는 힌두교 사상과 인도의 신비주의를 공부했고 그의 암자는 서양의 어떤 수도원의 지부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도원 제도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관상생활에서의 소박하고 참된 모험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은 서양 문명의 범위를 너머 그리스 철학의 좋은 점을 그리스도교 안으로 구체화하려고 했던 과거의 위대한 성인들과 같이 동양 신비주의의 엄청난 풍부함 속에서 복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도 탐구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관상 생활이 “수도원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지도 생각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 생활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관상가는 다른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단지 묵상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관상가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격변하는 세상을 잊어버리고 폭격기들이 수도원의 상공에 떼를 지어 모여들 때도 앉아서 기도에만 빠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관상 생활에 대한 문제의 대부분은 이런 완전히 부정적인 접근에서 옵니다.

관상 생활은 근본적으로 일치의 생활입니다. 관상가는 분열을 넘어선 일치에 이르기 위해 분열을 초월하는 사람입니다. 관상가는 어느 정도 자신과 사람들의 일반적인 활동을 분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맞는 말입니다. 외적인 삶에 몰두 하는 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영적 활동의 내적 중심을 발견하기 위해서 관상가는 자신을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단 이 중심을 발견하면 관상가는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많은 실패한 관상가들은 외적 소동에서 그럭저럭 이탈하고 자신의 존재의 영적 중심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잠시 하느님을 인식하고 관상 생활의 가능성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상생활이란 그들이 발견했던 내적 경험을 귀하게 여기면서 몸을 웅크리고 조용히 앉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것은 관상가를 자신 안에 가두어 놓고 다른 모든 현실을 외면하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에게만 몰두하게 됩니다. 그의 내향성은 그를 자신 안에 무감각하게 가두게 되고 이것은 모든 참된 관상의 파멸의 원인입니다.

관상을 추상적 개념으로 혼동되면 안 됩니다. 관상 생활은 자신의 정신 안으로 영원히 물러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작고 고립되고 전문화된 집단의 축소되고 제한된 존재는 “관상”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관상가는 다른 사람보다 평범한 생활이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가 관상가라는 사실은 더 크고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줍니다. 이탈했고 순수한 마음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편협하고 옹졸한 시각을 넘어섭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로 받아들이는 표면적인 혼란에 쉽게 휩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인간 삶의 순수한 현실을 더 분명히 볼 수 있고 더 직접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상가를 구별하고 관상가를 더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대해 훨씬 더 영적으로 이해를 잘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관상가의 정신이 정치적, 경제적 사안에 대해 더 깊은 실용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관상가들이 수학자나 기술자들을 그들의 분야에서 쩔쩔매게 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가장 현실적이고 급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관상가에게는 그저 어리석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관상가는 영원하고 정말로 깊고 인간적이며 참으로 영적이며 하느님적이기까지 한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관상가가 어떤 심오한 영적 분야에서 전문가일 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관상가가 그런 사람일뿐이라면 그는 자신의 소명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다른 사람과 모든 인류가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본능적이고 깊은 의무감을 가지고 완전하고 전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상가는 탁월한 선물과 영적 재능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단순함과 가난함에 의해 여기에 도달합니다. 그것만이 영적이며 하느님적이며 이해력을 넘어선 그 여정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현재 상태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에 가장 조화로운 사람이며 그 신비에 깊이 빠지는 사람이며 그 가장 깊은 고통을 잘 알고 그 가장 절실한 소망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도(道)와 조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관상가는 자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이해력을 가지고 세상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상가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명령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명령을 하고 누가 복종을 하는지 압니다.

변증법을 충실히 공부한 사람들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신비스럽고 역동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고 그 발견으로 역사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에는 적어도 한동안은 유사 영지주의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은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을 깨달으면서 그리고 점차적으로 지배하게 될 역사를 의식적으로 깊이 성찰함으로써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영지주의는 (그 순수한 형태로는) 비교적 고상하기 때문에 이것은 자극적인 유혹일 수 있습니다. (권력 정치를 했던 스탈린주의의 냉혹한 타락과 비교하면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광명주의나 마법적인 맛을 풍깁니다. 사실 그것은 유다-그리스도교의 메시아 신앙의 독단적이고 절충적인 타락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영지주의가 오늘날 유럽 지식인들에게 끈질긴 영적 유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본질적으로 실용적이며 실제로 메시아 신앙에 거의 유혹받지 않는 미국인들에게는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오늘날 그리스도교 관상가는 변증법의 일반적인 개요는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사의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에 의해 재림 때 하느님 안에 계신 ‘사람’과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의 마지막 계시로 역사가 향하게 되는 그 관상적 시각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약 성서의 내적 의미에 대한 재발견은 『신비적 지체인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과 ‘사람’의 신비에 대한 이 계시는 우리가 소극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깜짝 놀라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적 자유의 활동에 의해 그것을 만들어내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실존주의자 니콜라스 베르디예프(Nicholas Berdyaev)는 어떤 현대 철학자들보다 이 진리를 더 분명하고 절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매우 큰, 그러나 경시되는 그리스도교적 발견의 하나입니다.


묵시록이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상이라는 소극적 해석을 초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묵시록을 창조적 활동, 영웅적 노력과 성취에의 부름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람과 그 본성에 의존하는 종말은 사람의 활동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사람의 운명, p.290)


확실히,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베르디예프가 말한 사람의 활동은 기술과 힘으로 자신을 신격화 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창조적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로써 하느님에 대한 그의 참된 소명을 이행하도록 이끄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롭게 협력하는 활동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이 내세의 보상을 위하여 이 세상의 불의와 모욕을 참는 소극적이고 반사적인 몽매주의처럼 된 이유는 그 관상적이며 신비적 요소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종류의 종교를 경멸하고 풍자하기 위해서 그 결함을 무자비하게 이용합니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와 영혼을 신성시하게 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주장의 하나를 도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처음 듣고, 그들의 세례가 가장 높은 창조적 책임에 대한 소명을 가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은 그리스도인은 그 참된 배경으로부터 이탈에 의해서 불경스럽게 될 뿐인 이 주장의 숨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는 무례하게도 자신의 방법을 통해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가 그분의 손에서 건네받는데 실패한 그 과업을’ 맡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한번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비유 이야기는 유다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관상이 나머지 세상과 상관없이 단지 주관적 평화로 비밀스럽게 물러남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관성과 이기주의 안에만 숨어있는 관상은 위에서 다룬 부르주아적 영성의 부산물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어떤 것에 대한 부정이 아닌 내적 위로를 즐기기 위한 책임의 회피일 뿐인 현재 생활에 만족하는 부정입니다. 정적주의는 부르주아적 현상이고 중산층의 특징인 지적, 영적 게으름과 더불어 물질적 위로의 이기주의적 사랑에 대한 그 영적인 짝입니다.

이것에 대해 완전히 행동주의로 반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노동 운동에 통합하려고 시도하는 더 극단적인 노력에 대한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현혹에 넋을 잃고 하느님의 성령보다 압력 단체의 말과 술책을 더 신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하느님 백성에 대한 아주 오래된 유혹으로,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심하게 책망 받은 우상숭배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했던 바로 그 완고한 마음입니다.

정말로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서 흐르는 본질과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발견하고 함께 나아가도록 불림 받았을까요? 그런 신비는 상징일 뿐이며 만약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상징주의에 속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내적 실체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 모상인 사람 자신입니다. 이 실체는 사람뿐 만이 아니라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당신께 일치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중심이신 이 하느님의 실체는 비록 개념화되고 상징화될 수 있다 해도 상징만으로 충분히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실체를 상징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 상징은 그 실체가 아니며 그 상징 자체는 그 실체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상징을 사용하자마자 “그 상징이 그 실체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실체는 무엇입니까? 유일한 답은 그 실체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무지에 의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체는 정치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인, 기술주의자, 사회의 수완가, 사무적인 사람은  선천적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실체를 항상 대상이나 사물이나 힘이나 측정하고 정렬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실체를 측정하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은 더 이상 거기에 없습니다. 그 실체를 가지고 혹은 그것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은 여러분을 피할 것입니다. 사실, 역사를 지배하고 이용하려는 사람은 그것에 지배당하고 이용당합니다. 그런 사람과 역사는 서로 서로 지배당하고 이용당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방법의 창조물이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포로입니다.

이것은 다시 우리에게 실체에 대한 깊은 관상적 통찰력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따라왔던 사람이면 지금쯤이면 본능적으로 올바른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것과의 접촉에 도달하기 위해서 관상가가 꿰뚫어보는 “실체”는 사실 그 자신의 존재이며 그 자신의 삶입니다. 관상가는 다른 대상에 대해 마법적인 영적 직관으로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고 자기 겸손의 중심에 몰두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뛰어넘는 실체와 직접 접촉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찰의 대상으로써 자신을 버리고 잊음으로써 그는 자신과 다른 모든 실체를 함께 발견합니다. 이 “발견”은 개념과 실제적인 계획을 뛰어 넘습니다.

관상가는 역사나 사람의 영혼이나 하느님의 것에 대한 일종의 직관적 신비를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살아있는 진리의 중심을 추구합니다. 거기에서 다른 신비들 중에 그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필요한 순간에 주어집니다. 그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관상가의 지혜는 (그가 학자일지라도) 지식이나 학식을 소유할 필요가 있는 사람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잊고 지혜를 잊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그가 필요로 하기도 전에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얼핏 보면 인간 사회의 발전이 어느 정도 이런 초연하고 무심한 존재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나친 확신을 가진 정치인들의 화려한 속임수를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무력함과 수동성은 그 헛소리와 허풍에도 불구하고 꽤나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비록 (역사를) 이끌어나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역사에) 이끌려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에 있는 무기를 생각할 때 이 깨달음은 대단히 불안한 것입니다.

관상 생활을 칭송하는 것은 다른 모든 생활양식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적 노력에 대한 굳건한 토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침묵이나 내적 생활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사람은 에너지와 깨끗함과 평화에 대한 참된 근원과의 접촉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신이 되려고 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자신이 힘이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매 순간 지식과 힘과 통제를 필사적으로 원하고 셀 수도 없는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힘을 기억하고 그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이 힘이 이미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는 더 이상 그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필요한 때 그에게 주어지며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그를 위해서 생각하시고 그를 위해서 행동하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이것을 회피로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아 왔습니다. 사실 이것은 가장 높고 단순한 용기입니다. 이 용기가 없으면 삶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없고 그 삶의 참된 의미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핵심 내용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마태오 6: 25-34)


오늘날 세상의 악을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이 가르침에 반대되는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학살, 강제 노역, 대량 추방, 가난, 타락등과 같은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악은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에 대해 사람이 거절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은 아이러니칼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절하고 재물을 택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대로라면 우리가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관상생활은 현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가장 가치 있는 이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지금, 족쇄를 찬 사람은 해방과 자유를 찾아다닙니다. 그의 비극은 그를 영원히 더욱 노예로 만드는 수단들에 의해 해방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하고 종교적인 실체입니다. 그 뿌리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습니다.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드는 사람의 자유는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인 한 자유롭습니다. 그의 자유에 대한 투쟁은 자신을 뛰어 넘어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거짓 자율과 실체가 없는 자율을 포기하는 투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자유롭기 위해서 그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 자신과 같은 다른 것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압제는 각자가 자신의 열망에 노예가 되었다는 외적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열망에 노예가 된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독재자를 찬양하기 위하여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합니다.

외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전에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자유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때에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을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을 그에게서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 자유가 살아있게 하며 깨닫지는 못해도 모호하게나마 다른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관상가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영혼 안에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시킨 관상가야 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가 말한 이유입니다. 그만이 낙원에서 아담이 하느님과 함께 걸었듯이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이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서서 그 분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만이 하느님의 아들로써 그리고 만군의 주 하느님의 창조물로써 그의 존엄성을 가치 있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독단적으로 군주처럼 처신하면서도 지배적이거나 독자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전혀 조악하지 않은 그 자랑스러운 고귀한 특성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사실 우리의 영혼은 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그 분의 모상이 아닙니까? 영혼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창조된 이 고귀한 존엄성에서입니다. (그리스 교부학 44, 일하는 사람에서<De Hominis Opificio, Partologia Graeca>, p.136)







[부록 A]


내적 경험에 대한 참고 문헌


머튼 일기에서


1959년 7월 12일

이번 주에 나는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분량은 3배나 되었고 전혀 다른 책이 되었다. 1948년(‘관상이란 무엇인가?’를 쓴 해) 이래로 유수와 같은 세월이 흘렀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나의 사고가 얼마나 초라한 것이며 관상이란 단지 인간의 삶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관상가에게는 그의 모든 삶이 관상이기 때문이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수도 생활의 자만(vanitas monastica)에 대한 잔소리적인 항의로 변했다. 나는 너무 많이 항의했다. 그것은 나약과 떳떳치 못한 마음의 표상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재점검해야겠다. (일기 제3권, 고독의 추구 p.303)

1959년 7월 21일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쓰면서 “ -‘공장 같은’ ‘커다란 수도원’에 대해 너무 많은 비난을 했다. (고독의 추구 p.308)

1959년 8월 9일

(완전히 바뀐) ‘관상이란 무엇인가?’의 개정판 후반부는 만족스러운 것 같다. 아직 옛 책의 많은 부분이 남아 있는 전반부는 초라하다. (고독의 추구 p. 316)

1959년 9월 6일

이제 훌륭한 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내적 경험에 대해 몇 부분을 다시 고쳤다. (고독의 추구 p.327)

1959년 9월 29일

내 마지막 원고(내적 경험)가 그대로 책상 위에 놓여있다. 더 고쳐야겠다. 그 공간을 청소해야겠다. 많은 것들을 버리고 일할 준비를 해야겠다. (고독의 추구 p. 332)

1959년 11월 19일

책 3권의 탈고를 끝냈다. 이제 끝이다. 더 교정이 필요하다면 6,7년쯤 후에나 손볼 수 있겠지.

A. 수필 -과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

B. 존재론적 성사

C. 내적 경험(?)

(고독의 추구 p.346)

1963년 8월 26일

미완성 작품들을 같이 손보려고 한다. 몇몇 수필들의 개정본과 함께. 내적 경험의 개정본도 함께. ‘흠숭(과 경험)으로써의 기도’는 빼도 4,5권의 책이 손에 있다. (일기 5권 생명의 바다에서의 춤)



머튼 편지에서


데레사 렌트포 수녀에게

1959년 7월 4일

지금 (생각해 보세요) 나는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짜깁기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개정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또 다른 초기 작품도 교정할 것입니다. 많은 초기 작품들이 아주 불만족스럽고 넌더리가 나기도 합니다. 나는 너무 피상적이었고 너무 사변적이었습니다. 나는 삶의 전체성과 본질을 무사한 것 같고 관상에 대한 천사주의에 골몰한 것 같습니다. 아마 내가 법석을 떠는 트라피스트였을 때였습니다. 내가 조금 덜 완전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또한 교본에 따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편지 2권 기쁨의 길 p.233)

1959년 9월 29일

이번 여름에 ‘관상이란 무엇인가’의 간단한 개정본으로 시작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책 한권 분량이 된 내적 경험이라고 불리는 책을 끝냈습니다. 그것은 개정해야만 했는데 언젠가 손을 볼 수 있도록 내 책상위에 두고 있는데, 사방에서 드릴과 기계들의 소음이 가득해서 도무지 생각을 할 수 없는 이 집에서는 작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련자들이 이 비좁은 수방(修房)에 샤워 룸 두개를 만들기 위해 내는 소음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길 p.233-234)


체슬로 밀로쓰에게

1959년 9월 12일

나는 이제 막 또 다른 책 ‘내적 경험’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양적 사고와 더 관련이 있는 관상이라는 문제에 대한 더 넓고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줍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 밖에 없지만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편지 4권 진리에 대한 용기 p.63)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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