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계 간행물을 통해 군비경쟁과 냉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도로시 데이가 피터 모린과 창설한 가톨릭일꾼운동의 영향이 컸다. 머튼은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이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했으며, 도로시 데이와는 죽는 날까지 동지로 지냈다.
1962년에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책을 탈고했는데, 며칠 후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가 토마스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글을 쓰지 말고 침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수도자가 쓰기에 적합한 주제의 글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군비경쟁을 반대하는 글이 수도회에 불명예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는 총아빠스와 머튼 사이에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불화가 잠복되어 있어서 나타난 결과였다.
머튼이 이렇게 반박했다. "권위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차원을 보거나 듣는 게 수도자의 역할이 아니라, 단지 어느 누군가가 규정해 준 만큼, 또한 규정해 주었기 때문에, 기존의 견해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수도자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수도자는 전위부대가 아니라 장교가 시키는 것만을 이행하는 후방의 화물운송부대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맥락에서 쇄신에 관해서는, 수도자의 역할은 단순히 높은 분들께 무조건 찬성하는 일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교회 관료들의 목적과 지향에 맞춰 기도만 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토마스 머튼은 장상에게 순명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결국 순명하지 않으면 득보다 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의 입장을 더 들어보자.
"제가 속해 있는 곳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이 길을 제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했고, 그 길을 바꿀 기회가 왔을 때에도 이 길을 계속 걷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제가 눈엣가시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 되려고 해서가 아니라 제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제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상들이 제게 가하는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한 제약을 가하는 표면상의 이유에 제가 동의하거나,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집필 금지령의 이유에는 공산당신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가톨릭일꾼' 신문에 머튼이 글을 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포스트모던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이 책은 정식출판되지 못하고 등사본으로 알음알이로 주변에 회람되었다. 책을 받은 사람 중에는 훗날 바오로 6세 교황이 된 몬티니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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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은 1962년부터 열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의제 안에 전쟁과 평화 부분과 관련해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다. 다행히도 1963년에 요한 2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에는 머튼의 주장과 유사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또한 1965년에 인준된 <사목헌장>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목헌장>에서는 머튼의 주장과 동일하게 '자연법의 보편적 원리'를 거스르는 명령은 죄악이며, "맹목적인 복종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사면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자들에게 공공연히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람들의 정신은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이 당시 교회에 충격이 되었던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대 교회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외양은 거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며,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에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 ... 비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아시아적 종교심성의 발견
토마스 머튼은 <칠층산>을 쓴 지 20년이 지난 후 일본어판 서문을 쓰면서, 자신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가 세상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 온통 착색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죄많은, 자기 중심적인, 돈에 굶주린 세상과 불화를 일으켜 떠난 것이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통해 머튼은 그들에 대한 연민을 배웠다.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음도 발견했다. 따라서 머튼은 사랑과 진리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참상에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 길에서 아시아의 위대한 현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장자였다. 장자는 주전 550-250년 사이에 중국에서 활동한 도교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머튼은 장자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깨어나게 해주며 자각하게 해 준다. 선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가리킬 뿐이다."(선과 맹금, 49-50)
이것은 새로운 관점이며 경험이었다. 머튼은 <장자의 길>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쓴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을 쓸 때 나는 즐거움을 느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가 장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를 좋아하는 까닭을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장자의 길, 9-10) 에서 자기의 실존에 대해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은 것이다.
머튼은 기본적으로 기술과 과학에 대해 인색하다고 평가받았다. 하느님에 대한 진술 뿐 아니라 객관적 진리에 대한 염증이라고 할까, 이런 태도는 장자에게서 영향받은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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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이 라마와 토마스 머튼 |
신발이 맞을 때 발은 잊힌다 허리띠가 맞을 때 배는 잊힌다 마음이 바를 때 '옳음'과 '그름'은 잊힌다 (장자의 길, 112)
머튼은 과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말과 토론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고 있는지 의심했다. 구원의 신비에 대한 지성적 분석과 정교한 글들이 우리를 진리의 근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지 의심했다. 머튼은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인식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파악하기 위해 점점 더 복잡한 수단을 절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체계적인 절망이라 부른다.
장자를 통해 머튼은 비폭력에 대한 영감을 무위(無爲)의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관상생활에서 관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반대했다.
"우리가 만일 늘 관상, 관상, 하느님과의 합일, 신비적 합일, 하느님과의 친밀 등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우리는 진짜 즐길만한 것,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 하느님을 위해 찬양해야 하는 일상생활의 본질적이고도 참다운 경험을 노치게 된다."(소란한 세상에서의 관상, 351)
그리고 마침내 관상과 행동을 구분하는 일의 피상성을 간파했다. "도인(道人)이 추구하는 참된 평정은 무위의 행동 속에 있는 고요함, 달리 말해, 이름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행동과 관상의 구별을 넘어서는 고요함이다"(장자의 길, 26) 장자는 "물고기에게 필요한 것은 물 속에 잠기는 것이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도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했는데, 머튼은 하느님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런 체험 속에서, 모든 게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함으로써 세상이 달리 보이는 지경을 이른다.
"내가 선(禪)을 붙들기 전에 산은 그저 산에 지나지 않았고 강은 그저 강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선에 다가섰을 때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엇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이해했을 때 산은 산이었고 강은 강이었다."(선과 맹금, 140)
토마스 머튼의 <선과 맹금>은 1968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이 머튼을 방콕으로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 종교의 신비정통을 되짚어보면서 결국 서양 그리스도교의 케노시스(자기 비움) 개념의 참뜻을 깨달았다. 행동지향적인 서구인들은 자신의 힘과 영향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소유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생산력을 따져묻는다. 그런 이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의 중심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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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머튼의 묘소 | 그래서 우리가 침묵할 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가 스스로 비울 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위한 여백이 없다. 여러가지 일로 바쁜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민감하게 느끼는 대신에, 인위적인 자극이 주는 사소하고 변덕스런 감각적 만족에 빠져든다. 머튼은 관상가들조차 자아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관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비판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환상과 황홀경과 모든 형태의 '특별한 체험'에 대해 그렇게도 적대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선사들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선과 맹금, 76-77)
이런 그가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고 53세로 이승을 떠났다. 그는 이제 온전히 자신 마저 비어냄으로써 다른 몸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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