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좋은 글

[스크랩] 예수 탄생에서의 소와 나귀

소눈망울 2016. 12. 29. 09:04

전광식의 미술이야기

 

예수 탄생에서의 소와 나귀

 

 Fra Angelico Nativity, 1401

 

15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또는 그의 부인 베아토Beato의 작품으로서 현재 피렌체의 성 마르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이 그림은 성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숨은 스토리들을 잘 보여준다.

 

소와 나귀

성탄절에 행해지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들, 예컨데 동화와 성극, 또 찬양과 설교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정확하지 못한 정보들이 난무한다. 이를테면 동방박사들은 당연히 세명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세가지 예물,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릴 뿐이었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세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사람들은 또 성경에 아기예수님이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아기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화에는 말이 그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성경의 예수님 탄생기사 그 어디에도 말이나 마굿간을 언급하지 않는다. 나아가 예수님 탄생화에도 동방박사는 종종 세사람이 등장하는 데 비해, 말은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반드시 두 마리의 다른 짐승들이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소와 나귀이다.

예수님의 탄생화에 왜 소와 나귀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구약성경 <이사야> 1장 3절로 인해서이다. 서양의 화가들이 성화를 그릴 때는 그 장면구성을 반드시 성경에 정초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외경이라도 기초를 삼는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고 하셨다. 이는 소와 나귀 같은 한낮 짐승들도 주인과 그 주인의 구유를 알았건만,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며 나아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받은 이스라엘백성들은 정작 그 하나님을 몰라보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귀절을 화가들은 예수님을 몰라본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소와 나귀는 구유에 누인 인류의 주님인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표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대의 기독교화가들은 예수님의 탄생장면을 그릴 적마다 반드시 소 한 마리와 나귀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물론 이 두 마리의 가축들 외에 양떼가 등장할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왔을 때이고, 혹 개가 있으면 그것은 동방박사들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것인데, 특히 하얀색 개가 더더욱 그런 의미를 지닌다.

소와 나귀에 대해 교부들은 소는 유대인을 상징하고 나귀는 이방인을 상징한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이 짐승 두 마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배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르네상스와 근세의 일부 그림에서는 나귀는 나오지만 소는 빠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고 배척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중세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반유대주의 Antisemitism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누워계신 짚

누가복음에는 아기 예수님이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의 그림에는 구유는 비어있고 예수님은 짚 위에 누어있다. 짚은 가축들이 거하는 외양간에서 아기를 눕힐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자리이다.

외경 야고보 원시복음Protoevangelium Jacobi은 구유에서 아기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던 소와 나귀가 배가 무척 고팠지만 그 아기 예수님이 요처럼 깔고 누어계시던 밀짚을 먹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짐승들이 예수님을 배려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함과 특별한 열성으로 초대 교회사에서 유명한 콘스탄틴 황제의 모후 헬레나Helena가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그 짚을 찾아 로마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 이따금씩 논란이 되고 있는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된 여러 가지 설화들은 이 모후의 행적과 관련이 있다.

 

젊은 마리아와 늙은 요셉

또 우리들이 그림에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사실은 마리아와 요셉의 대조적인 묘사이다. 예수님의 탄생화를 위시하여 성가족을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은 마리아를 젊은 새색시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요셉은 매우 연로한 남자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그림도 젊은 마리아와 달리 요셉은 벗겨진 머리에 백발과 흰수염이 있는 늙은이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부부사이가 아님은 물론 부녀관계도 아니라 거의 할아버지와 손녀 관계처럼 비춰진다. 왜 동서방의 모든 성화들이 요셉과 마리아를 이런 식으로 묘사했을까? 그것은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면서 그녀의 영원한 동정녀성을 주창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녀의 남편 요셉은 부부관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죽기까지 동정녀로 남아 있었으며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동생들에 대한 기사는 친동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동방교회는 외경에 기초하여 요셉이 마리아와 재혼했다고 간주하고 예수님의 동생들로 나타나는 이들은 요셉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방 로마천주교회는 이 자녀들은 예수님의 사촌동생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없는 이러한 억지 주장들은 마리아를 숭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리아는 일반여성과 달리 죽기까지 동정과 순결을 유지했고 요셉과 인간적인 부부관계는 전혀 맺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과 함께 동서방 교회들은 수녀제도를 유지시키면서 수녀들에게도 육체의 순결을 요구할 근거를 구비하게 되었다.

 

콘라드 폰 소에스트Konrad von Soest의 그림에는 요셉이 아예 비하되어 묘사되기도 했다. 고급침대위에서 원광이 둘린 모습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대조적으로 백발이 성성한 요셉은 바닥에서 불을 지피며 음식을 장만하는 하인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이러한 성화들에는 비잔틴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비성경적 교리가 은근히 숨어 있다. 이런 점에서 성화란 긍정적 의미에서건 부정적 의미에서건 간에 회화로 표현한 일종의 교리서요 신학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요셉 곁에 있는 수사는 누구이며, 또 마리아 뒤편에 있는 여성은 누구인가? 이들은 일반적으로 이 성화를 요청한 주문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림은 아마 수도원에서 나왔고, 그림을 요청한 수도원의 원장이나 수사가 이 그림에 자신의 모습을 넣어주기를 청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마리아와 요셉은 물론 이들 두 사람, 그리고 지붕위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고 노래한 천사들까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아 경배하고 있다. 그들의 경배에 이미 십자가문양의 원광을 머리에 두른 아기 예수님은 두 손을 뻗어 축복하고 있다. 2천년 그때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성탄의 은혜가 그 모든 이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래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광식_고신대학교 교수, 늘빛교회 협력목사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