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靈의 사람

[스크랩] 삶과 거룩함 - 토마스 머턴

소눈망울 2016. 12. 29. 19:21

삶과 거룩함

                                                                            토마스 머턴 / 남재희 옮김, 생활성서사

 

 

       

 

 

차 례

 

서론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어둠으로부터의 구원
 불완전한 이상
 천편일률적인 성인상
 이상과 현실

제2부  이상들을 시험할 수 있는 틀

 새로운 법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사랑과 순종
 성숙한 그리스도인
 영적 삶에서의 현실주의

제3부  길이신 그리스도

 구성원을 성화시키는 교회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는 그리스도
 은총과 성사들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성령
 육(肉)과 영(靈)

제4부  신앙의 삶

 하느님께 대한 믿음
 하느님의 현존
 인간적 믿음
 신약의 믿음

제5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

 자선
 자선의 사회적 관점들
 노동과 거룩함
 거룩함과 인본주의
 실질적인 문제들
 금욕과 거룩함

 결론


서  론


 나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단순하고 기초적인 수준으로 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가톨릭 교회의 내적 생활의 원칙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관상’이나 ‘마음 기도’와 같은 주제들은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동시에 가장 신비로운 하느님의 힘과 빛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며, 우리를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인류의 선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서 그분의 도구로 일하게 하는 은총을 다룬다.


 그러므로 이 책은 행동하는 삶에 적합한 몇 가지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하는 삶(active life)’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행동하는 삶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돌보는 등 활동을 주로 하는 수도자들의 삶이 뜻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관상 생활’과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행동하는 삶’이라고 할 때에는 대체로 이런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관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애덕의 표현이자 세례를 통해 맺은 하느님과의 일치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고찰되고 있다.


 행동하는 삶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성사를 집전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자선을 펼치는 것일 수도, 사회의 영적 쇄신을 위한 전 세계적인 노력에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봉쇄 수도원에 은둔해 있는 ‘관상가’라 할지라도 사회의 위기와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가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그는 사회의 혜택을 분배받고 사회에 대한 의무를 공유한다). 그 또한 기도와 거룩함 외에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교회의 일에 어느 정도 활발하게 참여해야만 한다.


 관상 수도원의 경우에도 생산적인 일은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이고, 넓게는 사회에 대한 봉사로 볼 수 있다. 관상가들이라도 국가의 경제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역할이 갖는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특히 수도원이 피정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쉴 곳과 성찰이라는 ‘봉사’ ─ 매우 중요한 봉사임에 틀림없는 ─ 를 제공할 경우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미 이 책이 관상가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동하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동하는 삶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가시적(可視的)인 교회의 권위에 일치하면서, 인류 사회 전체의 영적, 물질적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삶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교 활동에 적합한 특정 기법들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모든 타당한 그리스도교 활동이 솟아나와야만 하는 원천이 은총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잎이나 열매가 아니라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동하는 삶을 다루면서 힘, 의지, 활동 자체보다 은총과 내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가?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은총과 마음이야말로 초자연적인 활동의 진정한 행동 원리들이기 때문이다. 광기와 인간적 야망에서 기인한 활동은 망상이며 은총에 장애가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장애가 되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행동주의라는 거짓 영성과 성령의 인도를 받은 그리스도교적 행동의 진정한 활력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모든 행동이 영적 생활에 위험하다고 섣불리 판단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분리를 가져와서도 안 될 것이다. 영적 생활은 외부와 고립된 은둔의 삶도 아니고, 온실에서 재배되듯 인공적으로 꾸며진 고행을 실천하는, 그리하여 평범한 삶을 사는 일반인들은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생활도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의무와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과 영적인 일치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지침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 생활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나 설교자는 그들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십상이다.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노동, 생산적인 사회 분위기와 통합되는 노동은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권력과 부를 좇기 위해 피곤한 광기와 낭비로 얼룩진 세계적인 투쟁에 휩쓸린 노동은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 삶에 효과적인 공헌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 책에서 그 주제에 관해 몇 장을 할애하고 있으나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했다. 논쟁의 소지가 있는 분야나 명확치 못한 부분은 제외하였다. 나는 개개인의 일상적인 노동이야말로 영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노동이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에 도움이 되려면 노동을 정신적이요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하느님께 바쳐야 할뿐만 아리나, 그것을 이 세상의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려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노력에 통합시켜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노동은 올바르고 정직해야 한다. 그리고 생산적이어야 하며 인류 공동체에 긍정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문명을 세우려는 인류의 보편적인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다가오는 세상을 가장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함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노력(거룩함을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다)은 또한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교회의 활동과 맥을 같이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로 후퇴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거룩함은 동료 인간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올바르고 생산적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사명에 대한 책임이나 참여를 피해서는 안 되며 피할 수도 없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강력한 어조로 “현세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인간관계로 이끌고 있으며, 그 질서는 인간의 노력과 예상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초월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의 완성을 향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이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동참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의무를 깨닫는 데 있다. 만일 이 깨달음이 거룩한 은총에 의해 밝게 비춰지지 않는다면, 관대한 노력으로 강화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리나 인류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선익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 깨달음은 한낱 허상에 불과할 것이다.


토마스 머턴

 

 

 

 

       

 

 

제1부  그리스도교의 이상


1-1. 어둠으로부터의 구원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죄를 거부하고 자신을 아무런 타협없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며, 하느님의 신비 안에 들어가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빛 안에 잠기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1고린 6,19 참조).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그분의 성령이 세례 때에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궁전이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우리의 욕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로부터 당연히 받으셔야 할 것을 받으실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자신의 천성적인 약점과 무질서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께 속한 것들은 그분의 성스러운 사랑의 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이기심으로 썩고, 비이성적인 욕망으로 눈이 멀고, 자만으로 굳어져서 결국 죄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허무의 심연(the abyss of moral nonentity)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죄는 영적 생활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할 때 나오는 내면의 질서와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이나 그분이 금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만이 아니다. 죄는 우리가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에 숨겨져 있는 우리 자신의 신비롭고 가변적인 영적 실재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죄란 창조 때 이미 계획된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 ─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형상 ─ 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죄는 마치 자유를 행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자유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거룩함과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 중 몇몇 사람들은 특수한 소명을 받고 수도 서원을 통해 더욱 엄숙한 계약을 맺어,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명인 거룩함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기도 한다. 그들은 더 확실하고 더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복음적 권고인 ‘완전하게 되기’를 서약한다. 그들은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세속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리스도께 더욱 완전히 자신을 바치고자 한다. 그들에게 성화(聖化)는 궁극적 목표로서 추구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업(本業)’이 된다 ─ 수도 서원을 한 이들에게는 인생에서 성인이 되는 것 이외에 해야 할 일이 없고, 이 목표에 따라가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며 시급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도자나 성직자에게는 직분상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고, 평신도는 어떤 면에서든 그들보다 뒤떨어지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젊은 시절 사막으로 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훗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룩함으로 부르심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에 지시되어 있는 바 오직 하나의 덕행, 하나의 거룩함만이 있을 뿐이다. 신약성서에 나와 있듯이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는 만큼 평신도의 신분은 분명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런 만큼 평신도들은 단순히 ‘죄를 피하기만 하는 것’, 최소한의 어떤 정적인 거룩함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가끔 이러한 직분의 차이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심하게 왜곡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은 완전함을 향해 성숙해야 하고 진전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평신도들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성직자들의 옷자락에 매달리거나 홀로 ‘완전함’에 불린 전문가들에게 이끌려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수도자들의 삶이 더 엄격하고 힘들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평신도들에게 그들의 생활이 덜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자칫 그들의 구원은 참다운 구원이 아니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수 있다. 오히려 반대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하느님은 수도원의 엄격함을 매일의 의무로 요구하실 만큼 우리(평신도와 재속 회원)을 엄하게 다루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이 주신 권고에 따라)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셨다. 어떤 사람은 동정을 지켜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물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만 도둑질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것을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을 뿐이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주석 중).


 달리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일상적인 절제와 정의와 자선은 수도자들의 정결 서원이나 청빈 서원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이다. 수도자들의 봉헌 생활이 좀더 엄격하고 내적인 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철저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평신도들의 삶을 하찮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혼인 역시 그 특성상 아주 신성한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혼인에 따르는 희생이 수도자들의 희생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그 신분이 무엇이든 실제 삶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질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수도자들만이 완전함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평신도들은 지옥만 면하면 된다는 오류에 맞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평신도든 수도자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완덕을 향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나무는 단지 살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되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집트를 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우리는 약속된 나라에 가야 한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설교 중). 동시에, 예를 들어 정결을 지키는 것을 비롯하여 복음의 이런저런 권고를 아무리 완전하게 지킨다 해도,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덕인 정의와 자선을 베풀지 않는다면 앞으로 말한 권고를 실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단식을 하거나 바닥에서 잠을 자는 고행, 재를 지키거나 쉬지 않고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만약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베풀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며,”(‘디도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설교 중) “당신이 정결을 지킨다 할지라도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주님의 신부(新婦)가 되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복음’에 관한 설교 중)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은 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의 기도와 거룩함은 교회 전체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수도자, 성직자들의 표양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 역시 ‘이 세상의 이방인이자 순례자’임을 가르치고,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도시의 허망한 동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들의 표양은 모든 일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만을 추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지복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우주적 재앙”이 될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새로운 신원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면 누구나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우리의 행동은 그분과의 일치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현존을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해 드러내 보이셔야 한다. 생각하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강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사람 안에 있는 “빛”은 하느님의 자녀 됨이며, 우리 안에 살아 계신 말씀이라고 믿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외적인 경신례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을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으로 보존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클레멘스는 덧붙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함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행하시는 영적 교육의 장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대상은 평신도이지 수도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빛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암흑에 싸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룩함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성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쳐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가? 주제넘은 생각은 아닌가?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사실 많은 평신도들은 물론 성직자들조차도 현실적으로 자신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적인 사고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겸손일까, 아니면 직무 유기인가? 패배 의식인가, 절망감인가?


 하느님이 우리의 성화를 바라신다면, 그리고 거룩함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사실상 그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빛과 힘과 용기를 틀림없이 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반드시 주신다.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받고 있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1-2. 불완전한 이상


그렇지만 이 미묘한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는 이유가 항상 악의, 게으름, 우둔한 죄 때문이라고 추측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혼란, 무지, 약함, 몰이해 때문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이 지니는 의미와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페 3,8)를 어떻게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구원과 무한한 자비의 신비는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도 모호하고 믿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지닌 깊은 의미에 응답할 용기도 힘도 없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우리의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그것이 가져올 참된 결과를 왜곡한 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회적 관계에 필요한 신분 상승의 도구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을, 신앙의 어두운 밤 가운데에서도 은총에 대해 꾸준히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실제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남부끄럽지 않게 동조하는 것이 거룩함이라고 간주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외적인 징표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식주의를 무조건 바리사이주의로 몰아세운다면 그것 역시 지나치게 진부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고상함에도 도덕적인 선의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선한 의도를 놓치시는 법이 없으시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희생 ─ 동료들과는 전혀 다른 외롭고 고통스러운 책임을 져야 하는 희생 ─ 을 통해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면, 깊이의 부재와 편파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거룩함의 길은 어떤 경우에도 힘들고 엄격하다. 우리는 단식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고통과 희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는 가운데, 이따금 ‘우리의 의향을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막연한 정신 자세는 자신이 진부하다는 것을 초라하게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세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다. 독실한 척하는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상징적이어서는 안 되고, 완전한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머릿속 활동이 아닌,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내어 주는 선물이자 투신이어야 한다.


 확실히 이 점은 우리 가운데 “종교가 되살아나고 있다.”라고 믿도록 유도하는 영성이 결여된 대중 종교가들의 설교보다는 조금은 더 진보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는 말자. 사람들이 겁을 먹고 불안해하며, 장밋빛 슬로건에 혹하여 자신들의 고통받는 영혼을 달래 주는 인간적인 위로를 받고자 더욱 자주 교회로 달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종교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는 증세일 수도 있다. 병의 증세를 깨닫는 것은 좋지만, 병을 근본적으로 고치지는 않고 엉터리 약으로 대충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에 대해 단순하고 유아적으로 판단하여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뿌리가 깊지 않고 인간과 사회의 요청에 대해 응답하지 못하는 피상적인 신앙은 결국 종교적 절대 의무를 피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 시대는 중대한 잘못(혹은 적어도 쉽게 죄로 인식되는 잘못들)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건설적이거나 선한 일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교회는 뻔질나게 드나드는 종교인들을 원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존경받을 만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긍정적인 도덕적 가치나 깊이 없이 단순히 외적인 존경을 받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20세기 독재 체제의 경험으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극도로 불의한 사회에서도 잘살고 일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든 악에 눈을 감아 버리거나 심지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 체제에 동참하였다. 신심이라는 울타리를 친 자신들의 공간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모든 일로부터는 물러나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종교를 이유로 내건 이 같은 초라한 변명은 무지몽매함과 도덕적 불감증을 가중시키고,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와 사회 전반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런 경향이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노동자 계급의 상실을 야기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함’보다는 ‘거룩함’에 관해 이야기해야 된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행동에 의해 성화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 안에서 또한 자신을 통해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거룩한 교회’의 삶, 믿음, 자애에 깊이 잠기는 삶을 살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렇기에 ‘거룩함’보다 ‘완전함’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미묘하지만 이기적인 성향에 기울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처지는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켜 비교하고 즐거워하면서 모든 덕을 완전히 갖춘 우월한 존재로서 자신을 관상하고자 하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와 연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반면 ‘영적 완전함’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바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비법에 관한 지식과 훈련을 통하여, 격정이 더 이상 그의 순순한 영혼을 방해할 수 없는 평정의 상태에 들어선 철학자에게나 어울리는 개념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교에서 의미하는 거룩함이 아니다.


1-3. 천편일률적 성인상


 성 베네딕토가 쓴 <수도 규칙서>에 보면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구절이 나온다. 거기서 그는 수도자는 거룩해지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길 바라서는 안 되고, 거룩하다는 명성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우선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실제적인 영적 완전함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전함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거룩함과 나르시시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교회가 우리에게 공경의 대상으로 천거하고 있는 영웅적인 남녀의 성덕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왔다. 성인들은 일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각 속에서 금세 정형화되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고정 관념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인전들은 대체로 비현실적인 영웅담이나 기적 같은 것들을 강조해 왔고 성화(聖畵)들 역시 그 점에서는 톡톡히 한 몫을 했다. 그리하여 거룩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인에 대해 대중적이고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아니면 목표 달성의 어려움 때문에 마치 교회가 그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도(正道)로 제시하는 것인 양 일정한 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 모델이라는 것이 각 성인들 나름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구현한 것이지만 이를 뭉뚱그려 만든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모방에 불과하다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런 틀에 박힌 이미지를 그려보기란 어렵지 않다. 성인은 실오라기만큼의 도덕적인 결함도 없다. 성인은 과거에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현재는 완전한 회심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죄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사소한 유혹도 느끼지 않은 채 성장한다. 물론 유혹을 받기도 하겠지만, 유혹이 그를 힘들게 하지는 못한다. 성인은 모든 것에 대한 확실하고 영웅적인 해답을 알고 있다. 성인은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불 속이나 얼음물, 가시덤불로 뛰어든다. 성인의 의도는 언제나 가장 고상하다. 성인의 말은 언제나 교훈적인 격언으로 가득하고, 모든 상황에 놀랄 만큼 적합한 말들이라 다른 이들의 생각까지 잠재울 수 있다. 이처럼 두렵기까지 한 ‘완전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인간적인 대화를 할 필요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성인들은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듯 유머도 할 줄 모르고, 감정도 없고 인류 공통의 관심사에도 아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인들은 매 상황마다 가장 알맞은 덕을 발휘하기 위해 항상 그들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왕과 그를 수행하는 고관대작들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에 문둥병자의 상처에 입을 맞춰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심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이 같은 이미지를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삶 안에서 재현해 보려는 순진한 신참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깨달아 갈 때, 우리는 속으로, 그가 결국은 옳았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같은 거룩함은 확실히 절대적인 것에 대한 사이비 예찬이다. 양보란 없으며 타협도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진심으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룩함의 기적이 어느 정도는 초자연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초자연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본성과 은총은 완전히 대립되는 것인가? 거룩함은 본성과 관련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배격하고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고정 관념이 되어 버린 이미지를 그리스도인이라면 실현해야 할 완전한 모델로 여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사람들이 그 모델을 좇으려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룩함의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 은총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혼란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은총은 본성을 완성한다.”라는 보편적 명제는 영성 생활에 미봉책을 허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진리로서, 성인이 되기 이전에 모든 인간성과 인간의 실제적인 조건인 나약함 속에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성인’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성인들은 모두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그들의 인간성은 거룩함으로 인해 더욱 풍부하고 깊어졌다. 성인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 ‘육화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인간적인 분이셨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그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고,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약함과 모든 고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육화한 말씀 안에서 또 그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보다 더 ‘초자연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해지려면, 우리는 우선 그분께서 그러하셨듯이 철저히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현존과 일치하고 천상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녀로서의 특권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거룩함은 인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인간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이 걱정해 주고 고통받고 이해하고 동정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한편, 유머와 세상의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만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인간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격하시키며, 자신을 남들과 다른 경이의 대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완전함에 이르는 길’의 서투른 모방이요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모방은 육화 신앙을 거스르는 명백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지키고자 하신 인간성을 경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무질서한 사회에서나 통하는 저급한 인간적 가치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도한 동물적 본능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깊숙히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 욕구들을 왜곡하고 개발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격정을 다스리기 위해 고안된 혹독한 고행 생활은 정서적으로 제대로 성숙하지 않고 천성이 허약하며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의 기술 지향적인 삶이 인간의 정서와 본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좀더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기계를 다루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 사이에서 생활이 양분된 사람은 조만간 그의 본성과 인간성이 심하게 훼손되어 고통받게 될 수도 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교적 교육으로 적절하게 계발되고 형성된 정상적인 지성과 정상적인 인간적 의지와 자신을 헌신하고 봉헌할 수 있는 훈련된 자유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먼저 건전하고 안정된 인간적 정서를 전제로 한다. 은총은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완성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는 건강하고도 본능적인 자발성이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감정과 본성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 안에서 활동하였다. 그분은 모든 일에 섬세하고 따뜻하고 사려 깊은 인간 됨됨이를 보여주셨다.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누르려고 해서는 안 되고(많은 경우 그 같은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 사랑의 봉사 가운데 정서 생활을 형성하고 계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바리사이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다른 사람들의 눈에 영웅적으로 보이는 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신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성인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거룩하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승복하는 사람이다. 그는 신적인 거룩함의 실체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거룩함을 자신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함을 가장 마지막에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 안에서 무(無)와 자기 중심적인 성향과 죄라는 거짓된 실체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룩한 구세주의 현존과 자비의 빛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어둠까지도 밝게 비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성인은 사람들이 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성인은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하느님 연민의 대상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또한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의 도구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세상에 비추는 창이 되기를 원할 뿐이다. 이를 위해 그는 거룩해지려고 한다. 그는 덕망 있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선함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영웅적으로 덕행을 실천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마태 5,48)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기를 추구한다.

 


1-4. 이상과 현실


 그리스도교적인 완덕의 정수를 몇 줄짜리 공식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가끔씩 그럴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공식이 담고 있는 의미를 금방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과, 거룩함이 단순히 공식 몇 개를 따라 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적절한 조리법을 고른 다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여러 가지 재료를 내 입맛에 맞는 방법대로 요리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영성을 다루는 몇몇 서적들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영성 서적 안에는 모든 것을 종합하는 새로운 기법을 발견한 ‘거룩한 영혼’들이 항상 등장하여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단순하게 처리해 주고 있다.


 모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단순한 방법을 구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통적으로, 인간이 제기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라. 그리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는 성령을 받을 것이다.”(사도 2,37-38 참조)라는 그리스도교적 답변은 ‘기법’이나 ‘기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베드로 사도가 첫 성령 강림절에 청중에게 한 설교는 구원이 어떤 기법을 따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한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그 몸의 구성원으로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의 상태나 친밀한 내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참사랑은 교회의 고통과 문제들과 열망에 동참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하느님 뜻에 맞갖게 쇄신시켜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도 이 과업에서 제외될 수 없다. 현대에 와서, 이 과업의 영역은 세상만큼이나 넓어졌다.


 그러나 이 과업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과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는 이상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줄 수 없다.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힘과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교육되어야 하고 거룩해져야 한다.


 단순하고 효과적인 공식은 복음에서만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복음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투명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요 구원의 말씀은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신비롭다. 우리가 ‘완전함’으로 불림받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완전함이 ‘그리스도의 계명’, 그 중에서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킴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신비 가운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각자의 삶 안에서 자주 당혹스러운 혼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 나가면서 우리는 각자 새로운 ‘길’, 자신만의 ‘새로운 거룩함’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현하는 데 있어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각각의 개별적인 소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며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삶에 대한 공식화된 법칙과 권고만 생각한다면 숨어 계시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일은 매우 간단해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찾아 행하고 악한 일을 피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 말이다. 우리는 마음에 어느 정도 뚜렷한 이상을 지닌 채 현실 생활을 그 이상에 억지로 맞춤으로써 거룩함을 정복하려고 든다. 우리가 믿건대, 단지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이상에 관대하고 충실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자주 그 이상 자체가 불완전하다고 우리를 그릇되게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우리의 이상은 객관적인 규범을 바탕으로 설정되었지만, 우리는 그 규범들을 매우 한정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터무니없는 욕구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을 무의식 중에 곡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욕구와 기대들, 우리 자신과 우리 삶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욕구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할 만큼 터무니없고 환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비록 신학적으로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지라도,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극도로 비현실적이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까지 잃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상을 갖고 있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상이 현실과 연관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삶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변증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변증법적이지 타협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수덕적 규범에 기초를 둔 이상들, 아니면 적어도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상들은 각각의 사람들 안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실현될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은 하나의 보편적인 완전함에 대한 통일된 기준을 자기 삶 안에서 실현함으로써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들과 한계 안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부르심과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사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특정 수행 방법(금욕적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부정과 기도 그리고 선행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고요하고 평정하게 질서를 이룸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찾는다기보다는, 우리를 더 간절히 찾아 헤매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국 찾아내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소유하시도록’ 해 드리는 데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총에 대한 개념 역시 모호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실상 우리가 은총을 반(半)물질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취급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은총이 어떤 신비로운 물질, 어떤 물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어떤 상품, 또는 어떤 초자연적인 엔진의 연료쯤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은총을 마치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 필요한 어떤 영적 휘발유처럼 여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은총은 매우 신비스럽고, 유추와 은유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자칫 우리를 오류로 이끌 수 있다. 분명히 은유적인 표현은 우리를 현혹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도록 만든다. 은총은 우리가 선행을 하거나 하느님께 다다르기 위해 ‘사용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된 ‘물건’이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이자 활동 그 자체다. 그러므로 은총은 그분에게 가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필수품이 아니다. 실제로 은총이란 우리 삶 속에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성화 에너지에 의해 우리 안에 생겨나는 존재의 질적 특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특히 신약성서에서 하느님 자신이신 성령을 받는 것에 비해 은총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적게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되지 않은 은총(uncreated grace)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령은 우리 영혼의 반가운 손님(dulcis hospes animae)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로마 8,9). 우리가 이 사실을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그분과 우리가 맺고 있는 친밀함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끊임없는 기쁨과 힘과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생명과 평화 자체이신 성령의 은밀한 내적 인도(로마 8,6 참조)와 더욱더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더 잘 맛보고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갈라 5장 참조). 우리는 우리 안에 숨어 계시는 성령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데, 그분은 우리가 기도를 하지 못할 때라도 우리 안에서 기도를 드리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 필요성을 모르는 것까지도 우리를 대신해 요청하여 주시고 우리 자신이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즐거움을 우리를 위해 찾아 주는 분이시다.


 “완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부지런히 그리고 사심 없이 하느님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발견되고 사랑받고 소유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심으로써 우리를 완전히 관대하게 만들고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게 하며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드리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극복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과 고통을 성령의 힘과 순수함으로 맞바꾸도록 허용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과 성령의 탄식을 잊은 채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켜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평정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영적 태도는 전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에 달려 있다. 만약 하느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진정한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향한 무한하고 뜨거운 그분의 관심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한 우리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확신을 갖고 성장해 갈 수 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인간적인 약점과 실패들 때문에 결코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엄하고, 우리에게는 그다지 관심도 없는 냉혹한 입법자, 단순한 통치자, 주인, 아버지가 아닌 심판관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좁은 길’로 갈 수 없다.

 

 

 

                   

 

 

제2부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틀

 

2-1. 새로운 법


 완전해지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이상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율’,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지켜야 할 일반적인 규범과 기준이 있다. 그러한 규율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영적 교리와 근간이 되는 폭넓고 보편적인 규범을 몇 장에 걸쳐 성찰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거룩하게 되기 위한 그릇된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개별적으로 소집하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소집은 부르심이자 ‘소명’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소명, 곧 당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가끔 우리는 그 소명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특권으로 여기곤 한다. 그들이 완전에 이르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봉헌한다. 그러나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르며, 자신의 삶이 허락하는 한 그분의 모범을 따라 마침내 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기도를 많이 하거나 9일 기도를 많이 바치는 것, 성상 앞에 초를 밝히고 기도로 밤을 새우는 것, 또는 금요일에 금육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미사를 드리거나 특정한 자기 부정의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런 맥락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종교적인 의미가 결여된 텅 빈 제스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 응답한다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고 실행하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죽음과 부활의 본질이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르셨다(마태 26,42; 루가 2,49; 요한 5,30; 히브 10,5-8 등).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은 아버지의 뜻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에 명확하고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선 바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 하나 위대한 계명에 가장 완전하게 요약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소유하시고자 죽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지금,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법이 되어야 한다. 이 내적인 법, 순수한 사랑의 법인 ‘새로운 법’은 ‘자녀 됨’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4-15).


성령은 외적인 계명인 옛 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이 옛 법을 내면화시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레 우러나는 사랑으로 하도록 만든다.
성령은 우리가 익숙한 법들과 상치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우리가 규범을 더욱 잘 지킬 수 있게 하시고, 가족, 직장, 각자가 선택한 삶, 사회적 관계, 기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대화 등의 의무를 사랑으로써성취하게 하신다.


성령은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라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하느님의 섭리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도 사랑을 다해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애정이 깃든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은총이 가득한 그 뜻을 충실한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함은 결국 충실함과 사랑의 문제, 특히 무엇보다도 의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모든 관계 안에서 표출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은 어떤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고, 우선권을 둔다는 것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을 보류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애정 어린 순종과 거리낌 없는 포기의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자신의 뜻을 꺾으면 꺾을수록 더욱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것이다. 또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욱더 일치하게 될 것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더욱더 가까워질 것이다.


2-2.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어떤 체계적이면서도 조직적인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신비롭고 거룩한 그분의 뜻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 내 희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흡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의지가 빚어 내는 허상일 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짧은 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는 거짓되고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방법을 고안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죄로 물든 나의 의지는 당연히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그 상황을 고치기 위해서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자발적인 욕구나 개인적인 관심사와는 반대되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항상 악에 더 이끌리게 되어 있어, 자연적인 욕구는 무엇이나 다 죄스러운 것이라는 이런 추론은 일종의 마니교도적인 가정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 즐거움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욕구가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원죄의 교리는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였고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항상 죄로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악마도 그렇다고 해서 천사도 아니다. 사람은 순수한 존재는 못 되지만 육과 영을 모두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실수와 악의에 찬 감정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확실히 죄인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사랑과 은총에 반응한다. 또한 선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도 응답할 줄 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그리스도교적 방식은 추상적인 논리의 추론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몸의 한 일원이고, 그가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는 정도는 그가 같은 몸을 구성하는 다른 일원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위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살아 계시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도 서로를 통해 신비롭게 전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한다. 하느님의 뜻은 이러한 상호 의존성에서 찾을 수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1고린 12,12-21).


그리스도교적 ‘방법’이란 전례의 준수, 고행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과 그의 형제간의 객관적인 관계가 요구하는 자발적인 사랑이라는 가치의 문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또 가시적(可視的)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 몸의 일원이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의해 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계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명시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는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1-17).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수덕(修德) ‘방법’이다. 모든 사람은 다론 이들의 벗이 되어 줌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원수마저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진정한 벗이 된다(마태 5,43-48 참조). 불의와 폭력 앞에서도 희생과 인내와 온유함의 정신으로 처신할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좀더 관대하고 친절해야 하며, 서로를 향해 모욕하거나 악의 섞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마태 5,21-26 참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방법’은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뜻을 그리스도 신비체의 실질적인 구성원과 잠재적인 구성원들 간의 상호 관계 안에서 찾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협력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삶 안에서 우리가 구원의 도구가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만나게 해 준다. 그리고 성령 또한 우리가 준 사람에게서 받고, 받은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삶은 성령의 활동에 의한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된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일치의 끈’이신 사랑의 성령과 협력하는 것이다.


이 일치는 살아 있으며 유기적이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외적인 일체감을 부여하는 조직 이상의 것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각자의 존재 깊숙이 살아 활동하는 생명에 의해 구성원들을 일치시킨다. 이 생명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비체의 구성원들 안에서 끝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각자가 능력에 따라 자신의 역할과 신분에 맞게 자신의 모든 형제들, 특히 사랑의 질서상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구원과 봉사에 투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부모, 자녀, 친척과 친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뻗어 가야 한다.


이제 우리의 희생을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는 규범이 되는 것은 사랑의 질서라는 분명한 가치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보다 보편적인 상위의 선을 위해 우리가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이 다른 이들의 행복과 교회의 선(善)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희생의 가치는 우리가 감당한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분열의 벽을 깨는 힘, 상처를 치유하는 정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질서와 일치를 복원하는 힘으로 가늠할 수 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12-21).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3-26).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3-18).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와 그들을 섬겨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자각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이 기본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구성원이자 우리와 동일한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중대한 의무가 있고, 또한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2-3. 사랑과 순종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에서 사랑의 우선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다른 의무들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교회는 외적인 법과 규범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조직적인 규범과 예식과 교도권을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교계 제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의 존재 이유인 사랑 가운데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면, 우리는 교회와 교회가 추구하는 삶에 대해 매우 왜곡된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의 법과 조직이 사랑의 내적인 삶을 보존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법은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피상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 법을 피상적으로 준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진지하고도 겸손되이 헌신적인 애덕(charity) 안에서 일치하지 않더라도 만족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피상적인 법과 조직에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애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조차 잊게 된다. 그것은 결국 순수한 성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거룩함이야말로 충만한 삶, 넘치는 사랑 그리고 우리 안에 숨어 계신 성령의 발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적 사랑은 분명히 그리스도적 순종을 요구한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더 완전한 고차원적 의지들의 결합은 순종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초적인 의지들의 결합 없이는 불가능하다. 순종을 배제한 채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순종이 마치 같은 것인 양, 사랑의 실천을 순종으로만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사랑은 순종보다 더 깊은 그 어떤 것이지만, 순종으로 내면의 영적 깊이를 열어 놓지 않는 이상 사랑은 피상적이고 감상적이며 감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순종은 사랑이 극단적인 형식주의가 갖는 격식들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힘을 준다. 순종이 없으면 우리의 애덕은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의 힘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규범이 필요하다. 순종은 우리에게 이러한 객관적인 기준들을 제시해 준다.


일상의 삶에서 잊혀지고 있는 단순하고 기초적인 이 같은 원칙들을 기억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거룩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이상으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참다운 전망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적 거룩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길이 멀고 내밀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것임을 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한 삶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에서 제시하신 단순함과 일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연관성 없는 개념들, 교리, 수덕의 원칙들, 도덕적 사례들, 심지어 법률적이고 전례상의 기술적인 문제들이 얽히고 설킨 미로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서로 일치시키며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애덕과의 연결이 약해지는 만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정리도 안 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영성 생활의 복잡함과 난해함에 당황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적 거룩함을 무슨 섬세한 수행 원칙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 전문가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믿어 버리게 된다.


분명 신학적인 지식과 수덕 생활의 경험은 그리스도적 사랑의 삶에 도움이 된다. 또한 법과 전례적인 규범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기 위해 충분히 공부하는 것 역시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12세기 시토 수도회 작가였던 페르세느의 아담이 말하듯 “법은 단지 우리를 구속하고 의무를 지우는 사랑(Lex est amor qui ligat et obligan)일 뿐”이라는 사실에 귀착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적 삶 안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잊음으로써 생기는 혼란과 오해는 우리에게 환멸감을 안겨 주어 거룩해지기는커녕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이상은 자칫하면 쉽게 패할 수도 있는 격렬한 시험을 당하게 된다. 이 시험은 ‘더 많은 노력’이나 ‘의지력’으로 해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지성적이며 영적인 빛이야말로 성화의 소명과 심지어는 그 사람의 신앙 자체를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리가 없는 ‘의지력’은 효과적이지 못하고 진리가 없는 사랑은 감상에 불과하다.


2-4. 성숙한 그리스도인


너무 왜곡된 나머지 현실적으로 거짓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교회와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대한 견해들을 억지로 받아들이려다 신앙마저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 같은 비현실적인 견해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에 관한 불완전하고 부족한 개념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신앙을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잃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억지나 자책, 이류(二流)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잘못된 노력이 아니라, 진정한 주제를 명백하게 가려내고 진실한 견해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은 가장 철저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이 시험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거룩함과 (유치함이 빚어 내는 허상을 두려움 없이 벗어 던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시정하고 새롭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일생 동안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과 부대끼며 맞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속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까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폐단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사회’라는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유하고 안전한 현대 유럽과 미국 사회는 확실히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사회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전통의 흔적에 매달려, 자신들이 아직 그리스도교적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19세기와 20세기의 실용주의와 세속주의 정신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정신의 깊은 곳까지 침투하였다. 한편, 프랑스 혁명과 그 영향에 격렬하게 대항하던 19세기의 교회가 얻은 것은 경직된 사고와 새로운 발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안에 많은 갈등과 명백한 모순을 배태(胚胎)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는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측면에서 폐단과 양심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조만간 다른 사람에게서든 자신에게서든 그리스도인들의 단점들과 맞부딪치게 되는 것은 정상적이며 필연적이다. 교회의 삶과 활동은 언제 어디서나 이상적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신앙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정직하고 신실치 못한 자세이다. 역사가 그 반대의 사실을 증명한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하느님과 진리의 이름을 내건 채, 은밀한 방법으로 편견과 타성과 정신적 마비 상태에 머물러 있다. 거룩함 대신 심각한 도덕적 무질서와 불의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 분명 교회가 스스로 오류를 가르치거나 불의를 조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용하여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많은 오류와 부정직과 불의의 요소를 양산한다. 또한 교회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해 버리는 습성에 빠져 영적인 영역에서든 사회적 영역에서든 그 안에서 정의와 진리를 수호해야 할 자신들의 마땅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진리와 하느님 교회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진지하고 겸손한 관심을 갖고 이러한 문제들과 대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는 일에 협조하는 법을 배워야 하되, 경솔하고 반항적인 열성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교만함은 절대 은총의 징표가 될 수 없다. 11세기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교회 안에 만연된 악습에 격분한 수도자들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먼저 하느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고, 약점을 지닌 형제들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성인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임의적이며 일반적으로 가해지는 엄중한 처벌에 반대하였고 무력을 이용한 종교 개혁이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사랑과 겸손과 봉사의 정신이지 전제주의와 권력을 방어하기 위한 폭력의 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단체 심지어 교회 내에도 악습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정직함과 겸손과 사랑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것을 숨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 각자는 한 개인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광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것을 자신들의 내적인 삶을 위한 좋은 목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순종의 정신, 교회에 대한 초자연적인 사랑을 순수하게 단련시킬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이용할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직접 바라볼 능력조차 없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기 가슴을 쥐어뜯는 번민을 피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번민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를 수 있으나, 번민은 계속된다. 한편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심각한 수치가 된다. 그들은 그 상황에 대항하고, 교회를 저주하며, 심지어 거기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그리스도적 소명의 참된 의미에 가까이 다가섰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되는 희생을 치러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그 희생이란 곧 자신과 다른 이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완전함에 관한 진실과 마주하여 교회가 단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 평화롭고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를 피동적으로 성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반대로 이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공동체에 자신을 내주어야 하며 교회 안의 모든 고통에 적극적으로 관대하게 동참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에 무가치하게 보이는 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온갖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2고린 9,6-8).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 상황이 절망스럽고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희생이 대부분 쓸모 없는 일이 되어 버릴 때, 이런 때일수록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분은 우리의 희생을 보고 계시며, 그것이 사람의 눈엔 아무 쓸모 없이 보이고 절망스러울지라도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의 두 눈이 열려 실제적이고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선을 다른 사람들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 같은 우리의 소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다.

 

2-5. 영적 삶에서의 현실주의


존 타울러는 한 설교 중에,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을 찾으시는 것은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여인이 잃어버린 은화를 찾기 위해 온 집 안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이렇듯 ‘뒤집어 놓는 것’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인 완전함에 대한 환상을 품은 채 편안히 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수동적인 정화를 뜻하는 ‘어두운 밤’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일에 대해 갖고 있던 인간적인 관점들을 버리게 되고 사막으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빵만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양식으로 자라나게 된다. 현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이 완전한 성숙에 이르기 위해 수동적이며 신비적인 정화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공방을 벌였다. 여기서 양측의 공방내용을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단지 진정한 거룩함이란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표출하는 것이고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의 죽음이며, 새로운 차원을 살아가기 위하여 매일 일상의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 새로운 차원의 삶이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본래의 자아를 되찾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나 자신이다. ‘새로운 인간’으로 완전히 변화되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나는 영적으로 변했고 하늘의 아버지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divinized).”라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거나 역겨운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드는 ‘이상들’을 간직하는 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완전해지려면 도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삶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며, 그 모든 장애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정화와 변화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함으로써만이 성인이 될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만 잘못 인도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절망과 파멸에 이르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젊은이들은 일단 종교적 헌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본다. 그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완전함을 제일 갈구하는 이들처럼 보인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씌운 철창을 부수려는 진지함과 열성은 그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가끔 영적 지도자들은 이 불쌍한 수난자들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대신 모든 문제의 원천이 되고 있는 거짓 이상을 고무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간혹 겸손으로 오인되기도 하는 자신에 대한 병적인 증오심은 유익하지 않다. 육신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마니교도적 미움으로 얼룩진 영적인 이상은 희망이 없다. 유치한 자아 사랑을 개량한 천사주의 역시 우리를 영적인 자유나 거룩함으로 이끌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격정을 다스리기 위하여 투쟁해야만 하고 깊은 겸손과 극기 안에서 우리의 영을 고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터무니없는 욕구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수련을 위해 자신의 정당한 욕구마저 희생해야 한다.


타협 없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세상을 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희생과 기도 그리고 세속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 완전함에 이르는 길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실제로 단식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부인하고 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완전함이 실질적인 작업에 의해서, 다시 말해 순명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들과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 그 자체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느님을 위해 단순히 외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진정한 완전함을 이루는 데 필요한 내적인 사랑이 결핍되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알려 하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대화하며 관상 속에서 자신을 그분께 봉헌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기도 하다.

 

 

 

 

제3부  길이신 그리스도


3-1. 구성원을 성화시키는 교회


  완전함이란 주님과 일치하는 데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밖에서 구해야 할 어떤 도덕적 장식품이 아니다. 완전함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손수 완수하시는 작업이다. 완전함은 성령의 은총으로 완성되는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해서 좀더 완전하게 사는 길을 볼 수 있는 그분 가르침과 교회의 성사와 교훈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완전함으로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서약과 함께 종교적인 신분이 주어진다. 교회의 가르침 아래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영감에 따르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Spirit of Christ)의 인도를 받고 외적으로는 가시적인 교계 제도, 법, 가르침, 성사와 전례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는 ‘하나의 그리스도(One Christ)’로 성장해 간다.


  우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기관이나 단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가르침과 통치와 예배 방식 안에서 확실히 가시적이며 명백하게 인식 가능한 실체다. 이러한 외적인 특징들을 통해 우리는 내적으로 교회의 혼이 지니는 빛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영혼은 인간적일 뿐 아니라 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성령 그 자체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이 불완전함은 그분의 완전함과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일치되어 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과 살아 있는 유대를 맺고 있는 한,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지탱되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정화된다. 전능하신 구세주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통해 구성원인 우리 자신을 확실하게 성화시키고 인도하시며, 우리를 이용하시어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다운 본질은 하나의 몸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며’ 서로에 대해 거룩한 섭리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인들의 통공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거룩한 이들이다. 그들의 기쁨은 생명의 강이라는 순순한 흐름을 맛보는 것으로 그 강물이야말로 하느님 도시 전체를 기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함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그분과의 교류를 심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문제이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삶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깊이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들과 더욱 가까운 유대를 맺어야 함을 의미하며, 살아 있고 성장하고 있는 신비체라는 영적인 조직 안에서 그들과 더욱더 충실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영적인 완전함이 ‘사회적 순응’의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종교라는 효율적인 기계 안에서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자신의 영혼이라는 지성소에서 내적으로 하느님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결코 성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교도권에 의해 축복받은 전통적인 규범의 규제를 받는 수도자의 평범한 일상은 확실히 가장 값진 성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수도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그 규범들은 목적을 갖고 있고 목적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건물을 짓느라고 설치한 임시 장치를 실제 건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실질적인 건물이라고 하면 사랑과 희생, 그리고 자기 초월로 가득한 마음들 간의 일치인 것이다. 이 건물의 건실함은 성령이 우리 각자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체계에 의해 정돈되고 규제되는 외적인 행위들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삶은 필수적으로 특정 질서를 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형제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그러나 질서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단순히 질서정연하다고 해서 그것을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적인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건물 자체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임시 장치를 영구적으로 더욱 단단하고 안전하게 세우는 데에만 너무 많은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고독하고 내면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지녀야 할 진정한 책임에 대해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어느 누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 내면적인 영역에서 진보나 완전함을 증명할 만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반면 외적인 영역에서의 발전은 쉽게 측정될 수 있고 결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보여져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진실되며 지속적인 작업은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이 작업은 명백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대한 충실함이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충실함이다. 그분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전적으로 지배하도록 수락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내적이고 고통스러우며 극단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우리가 전례 때마다 교회와 함께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각자 내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놓았을 경우에 한해서만 진실하고 타당한 것으로, 그 뜻은 외적으로는 교회와 그것의 위계로 나타나고 내적으로는 은총이 주는 영감에 의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투항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거는 것이며,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부터 모든 힘과 거룩함을 기대하는 것이다.


3-2.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는 그리스도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로,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이 단순히 도덕적인 완전함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지만 덕들을 모두 합친 것 이상이다. 거룩함은 선행이나 도덕적인 영웅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존재론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거룩한 삶에 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의미에 관해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밝힌 다음, 그 결론으로 윤리적 가르침을 주고 있다. 사도 요한 역시, 우리 삶의 영적인 열매들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또한 그분의 신비체에 통합됨으로써 나오는 결실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그 몸에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요한 15,1-11 참조). 그렇다고 이 사실이 덕행과 선행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존재에 견주어 본다면 이것은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행동은 그것을 행하는 존재를 그대로 반영한다(Actio sequitur esse).’ 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수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내적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 다음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에 따라 살 수 있게 되는데, 성령은 새로운 생명의 영이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우리의 존재론적인 거룩함은 바로 성령과의 살아 있는 일치를 말한다. 성령께 순종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윤리적 선(善)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규칙, 일련의 윤리적인 실천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갈라 6,15 참조)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드러나는 믿음”(갈라 5,6)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비로소 모든 덕행과 사랑의 원천이 되는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의 삶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덕행을 실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케 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기인하는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새로운 존재를 덕행의 실천을 통해 표현하는 삶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모든 열성을 다해 그분이 당신의 덕과 당신의 거룩함을 우리의 삶 속에서 표출하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이기심과 불순종이라는 장애물과 그분의 사랑에 어긋나는 모든 집착을 없애 버리는 쪽으로 집중되어야만 한다. 교회가 대영굉송 가운데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라고 노래할 때, 거룩한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만 거룩한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세상에 전달되고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거룩해지셔야 한다.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셔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1고린 1,24.30)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우리의 동의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한다.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그분 스스로 하고자 원하시어 그분께서 보내시는 빛 가운데서가 아니면, 어느 누구의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어떠한 머리로도 관상할 수 없는, 모든 시대를 지배하시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 불멸의 왕이신 아버지의 감추어진 거룩함의 계시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은 자신의 영광을 구할 수 있는 윤리적인 모험이나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그의 아들을 통해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영혼을 숨어 있는 거룩한 신비의 심연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신비적인 삶에 깊이 헌신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대단히 신비적인 종교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의 기술 사회가 바라는 ‘신비가’는 아니며 신비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통교를 이루고 하느님을 계시하는 신비의 차원 안에서 살고 있으며, 신비의 차원을 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목표인 동시에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의 목표이기도 한 구원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1베드 2,9)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삶과 희망을 그리스도의 신비에 두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된다(divinae consortes naturae)”(2베드 1,4 참조).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의 힘과 하느님 빛의 에너지는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여 성령의 작용하심으로 우리 삶의 ‘밝기’를 한 단계 더 높여 준다. 그리스도인의 성덕의 뿌리와 근본은 여기에 있다. 이 빛, 우리 삶의 이 에너지를 보통 은총이라고 부른다.


  은총과 사랑이 성령에 의해 한 몸으로 부름받은 형제적 유대 안에서 빛나면 빛날수록 그리스도께서 세심에 더 많이 드러나시게 될 것이고 아버지께서 그만큼 더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이 “회복됨”(에페 1,10 참조)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그만큼 더 최종적인 완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3-3. 은총과 성사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영혼들 안에 생생하게 현존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의 모상(likeness)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상이야말로 하느님의 눈에 ‘의(義)가 되는 것’이고 참사랑과 다른 모든 덕의 뿌리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다. 그것은 거룩한 유산으로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소진되지 않는 보물이며 ‘영원히 솟아나는’ 살아 있는 샘물이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 서두는 하느님 자비로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생명의 은총에 대한 기쁨에 찬 찬가로 시작하고 있다. 이 은총은 우리가 죄 중에 죽어 있었을 때에 주어진 것으로 하느님 사량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바로 그 힘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켜 구원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분깃을 하늘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1베드 1,3-9).


  그리스도교가 신비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곧 성사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사는 ‘신비’로서,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거룩한 사랑의 자극 아래 활동한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적으로 자유롭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 성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시적이며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성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도록 ‘만드는’ 무엇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작용하여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무상으로 주신다는 표징이다. 그 표징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만 그분께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과 영혼이 그분의 활동에 반응하게 만든다. 그분의 은총은 아무런 외적인 표징 없이도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으나 그럴 경우 우리들 대부분은 그 선물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효과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며, 또 마음을 다해 응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성스러운 표징들이 우리에 대한 은총의 근거로는 필요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야 할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 참으로 대비되지 않는가!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의 형용할 수 없는 빛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당신 생명을 우리와 공유하고자 하신다면, 당신이 직접 이 전달과 공유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결정하실 것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부터 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세례반(盤)으로 나아간 것이고 우리를 씻어 주시는 보속의 강물에 다다른 것이다. 우리는 축성된 성체로부터 자양분을 얻으며 성체를 통해 주님의 몸을 참된 영적 양식으로 먹는다. 성체는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며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영적 혼인을 보증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뿐만 아니라 성사적 일치를 통해서도 ‘그분께 나오기를’ 바라신다. 모든 성사들, 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분명히 그분 신비 안에서 하나 됨을 뜻하고 상징할 뿐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실제로 실현시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6-57).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위는 성찬 전례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되며, 영과 진리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과 신앙의 성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교회의 성사와 예배를 통해 구현되며 충족된다. 그러나 그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죄를 씻고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며 부패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 자녀로서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 곧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신비의 길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성사의 신비가 마술 같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만약 성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응답 여부에 상관없이 무조건 은총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는 마술이다. 성사를 받는 사람들이 열렬한 헌신이라는 주관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사는 그 성사가 표시하는 효과를 낸다(ex opere operanto). 다시 말해, 성사는 어떤 상황에서건 객관적으로 효력을 나타내지만, 성사가 표시하는 은총은 적절치 못한 사람에게는 전달되지 못한다. 성사는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비 신자가 물로 세례를 받게 되면 그는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성령에 의해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선택과 헌신이 전제되어 있으며 의무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적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전제로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자신을 영원히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를 거부하고 사랑의 삶에 헌신함을 의미한다. 성사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새 존재의 존엄성에 걸맞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요한 1,12-13).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쫓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1요한 1,5-7; 2,1-2).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1요한 2,3-6).

 

3-4.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성령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추상적인 법규를 충실히 지키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의 암흑에서 이끌어 내주신 살아 계신 하느님, 거룩한 인간,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근간으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적 삶은 율법주의가 되어서도 안 되고 단순히 의무에 대한 충실함의 여부로 판단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감사와 사랑과 찬미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찬 전례의 감사 윤리(eucharistic morality)로서, 그리스도에게서 받게 된 우리의 새 생명에 대한 공동의 감사와 올바른 평가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의 법전이다. 이러한 감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함께 불러모으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내포한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매 순간우리 모두 안에서 활동하시며 풍성케 해주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리스도교 윤리는 사랑과 찬미에 중점을 두고, 부활한 주님이시자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영광받으시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갈망에 그 핵심을 두는 윤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덕행과 선행이 비인격적인 규칙을 냉정히 지킴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거룩한 사랑으로 가득 찬 성심의 요구에 대해서 각자가 대답하는 사랑의 응답이다. 부활하신 구세주의 성심은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으로 은총과 사랑의 미소한 자극을 전달해 주시는데, 이를 통해 그분은 당신의 신적인 생명을 우리와 나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반응이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의 따스하고 섬세한 자극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서 그분께로 옮겨 갈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깊고 생생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마음에 더욱 풍부하고 역동적인 신앙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할 길 없는 감사의 정으로 채우고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극명하게 인식시켜 준다. 이는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신의 사랑과 일치하기를 바라시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감사가 밑바탕이 되는 사랑이라는 ‘성찬 전례적’인 윤리는 도저히 피할 수 없던 갈등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더욱 성장한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을 때는, 거룩하게 된다는 것과 율법의 엄격한 요구를 채운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임을 깨달을 뿐이었다고 말한다(로마 7,13-25 참조). 그러나 지금은 사랑이신 구세주의 은총으로 그 율법을 지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사랑 안에서 그 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속의 죄를 죽이시고, 우리 가운데 사랑을 낳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법들을 충실히 지키려고 마음을 쓰는 대신, 선한 것에 대한 사랑을 깨우쳐 주고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성령의 현존과 사랑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완덕의 길은 모든 면에서 사랑과 감사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길이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에서든 우리 자신의 힘이나 빛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 몸인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빛과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 언제나 우리 마음과 교회 안에 머무시는 성령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데, 그것은 얼마만큼 사랑으로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의 몸이신 교회의 지체로서 얼마만큼 생기 있고 활발한 일원으로 사는가에 비례한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계시되는 그분의 뜻에 지속적으로 사심 없이 충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죽음의 어두운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오직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이 생명이시며 진리시라는 것을 알며 그분이 이끄시는 곳이라면 아무런 잘못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신뢰하는 데에 윤리 생활의 모든 것이 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로마 8,1-3).

 

3-5. 육(肉)과 영(靈)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육(flesh)’ 이 아닌 ‘영(spirit)’을 따라 ‘걸으라’(여기서는 살라는 뜻)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육이란 육체적인 삶이 아니라(성령께서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성화시키셨으므로) 세속적인 삶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에는 욕정이나 방탕함뿐 아니라, 세속적인 기준에 맞추어 사는 것, 인간적인 관점이나 사회적 통념을 근간으로 하는 활동들까지도 포함된다.


  우리가 편견, 자기 만족, 편협함, 집단적인 오만함, 미신 숭배, 야망 또는 탐욕의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육’을 숭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이 진실한 마음에서가 아닌 위선적인 가식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육’적인 것이다. ‘육적인 편향’은 그것이 비록 사람들의 찬사를 불러일으킬 만큼 용기 있고 매혹적인 행위일지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인간들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을 쫓지 않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구한다. 반면 ‘영’은 우리를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이끈다.


  ‘영’의 법은 겸손과 사랑의 법이다. 영의 목소리는 육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지성소로부터 우리에게 들려 오는 것이다. ‘육’은 우리의 외적인 자아이며 거짓 자아이다. ‘영’은 우리의 참 자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는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inmost being)이다. 우리 존재 안의 이 감추어진 지성소에서 울려 나오는 양심의 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내적 목소리인 동시에 성령의 목소리가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존재’가 되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며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교적 덕은 이러한 내적인 일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의 자아는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생각과 같아지며 우리의 바람은 그분의 바람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과 온전히 하나가 된 삶이 되고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삶이고, 완전한 영적 진지함이며, 이로 말미암아 영웅적인 겸손함을 함축하는 삶이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진리 역시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가치하고 하찮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아야 하고, 자기 자신의 덧없음을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받아들여 당신 자신의 형상과 모상으로(in his own image and likeness) 변화시키고 성화시키고자 하시는 바로 그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안에 현존하는 악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신뢰하는 가운데 참을성을 가지고 악과 겨룰 수 있을 만큼 차분하고 객관적일 수 있게 된다. 성령을 따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육적인 것을 거부하고, 우리의 선한 의도를 지켜 나가고, 잘못된 외적 자아의 요구를 부정하며,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활동에 우리 마음의 전부를 내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9-11).


 우리가 세례와 신앙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하였다 하더라도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는 여전히 악한 경향들, 즉 과거의 삶에서 기인하는 ‘죽음’의 씨앗과 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총은 그것이 자라는 것을 막아 주고 우리가 이런 경향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구원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악한 성향이라기보다는 당신께서 주신 선함이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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