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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토마스 머튼 읽기-1] 토마스 머튼, 세상을 떠나 고독으로 들어가다

소눈망울 2016. 12. 29. 19:25

토마스 머튼, 세상을 떠나 고독으로 들어가다

 

[토마스 머튼 읽기-1]

 

2009년 12월 16일 (수) 23:15:06 한상봉 isihan@nahnews.net

   
▲ 토마스 머튼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한 지혜와 사랑을 역설했던 토마스 머튼이 53세로 이승을 떠났다. 그는 방콕에서 아시아 지역의 관상수도회 원장들 모임에 참석해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릭교회의 관상수도원운동에 대해 강연을 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날 강의를 마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선풍기에 연결된 전선에 감전되어 죽었다. 방콕에 머물던 미군장교들은 그의 시신을 애석하게도 방부처리해 수송기편으로 켄터키로 보냈고, 12월 17일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는 37권의 책과 숱한 논문을 통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진리를 갈구했던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삶의 갈피 마다에서 감지했던 인간적 고뇌와 지혜를 송두리채 세상에 공적 자산으로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을 더듬어볼 필요를 느낀다.   

 

뚜렷하지만 짧은 생애의 갈피들

 

헨리 나웬은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묵상을 다룬 책, <기도의 사람 토마스 머튼>이란 책을 냈다. 여기서 나웬은 그를 가리켜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했던 삶"이라 했다. 나웬은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딱 한 번 그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에게 가장 깊은 영감을 주었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관상과 혁명이 결코 나뉠 수 없는 급진주의의 두 양식'임을 통찰했다고 말한다.

 

   
▲ 토마스 머튼의 어린시절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의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뉴질랜드 태생의 화가였으며, 어머니 역시 오하이오 출신의 화가였다. 아버지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따금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모의 영향 탓인지 머튼은 다섯살 때 이미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머튼이 태어난 이듬해 가족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롱아일랜드에 정착했는데, 머튼이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그림 전시회 때문에 객지를 떠돌던 아버지는 1931년에 런던에서 뇌종양으로 숨진다. 당시 열여섯살이던 머튼은 영국 오캄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클레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1934년까지 머문다. 스무살 되던 해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긴 그는 공산주의자 모임에 참여하며 학생들의 간행물인 <제스터>의 삽화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에티엔느 질송의 책을 통해 스콜라철학에 접하고, 불교 승려였던 브라마차리와 교분을 맺으면서 그리스도교의 풍요로움에 눈을 떴다. 결국 1938년에 무어 신부에게 교리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16일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때 십자가의 성요한의 영향을 받아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기도 하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마음도 먹었으나 포기하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 뉴욕 올린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방학에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피정을 했다. 

 

1941년에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을 떠나 뉴욕 할렘의 가난한 흑인들 가운데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던 1942년 12월 10일, 스물여섯살의 머튼은 모든 옷가지와 책을 주변에 나눠주고 더블백 하나만 들고 홀로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갔다. 

 

 

   

▲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의 토마스 머튼

 

토마스 머튼은 1968까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고, 1948년 출간한 자서전 [칠층산]으로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수많은 글을 통해 영적 갈증과 평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자로 살았던 26년 동안 수도원을 떠난 것은 불과 몇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1968년에 수도원을 떠나 아시아로 가는 여행을 허가 받았으나, 아시아 종교의 숨결을 느끼며 갑작스런 감전사고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이송되어 12월 17일 안장되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길인가

 

토마스 머튼의 청년기는 [세속적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일기에 잘 나와 있다. 그는 세상에 대해 냉혹하리만큼 냉담한 태도로 비판했다. 놀랄만큼 민감한 청년이었던 머튼은 여행과 독서를 통해 얻은 인식력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이러한 능력은 훗날 그가 고결한 관상과 진정한 돌봄으로 이끌리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삶에 대해 진정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길인가 고심을 거듭했다. 특히 할렘 지역에서 일하면서 그 갈등은 더 깊어갔다. 즉,  뉴욕 5번가에 있는 부유한 성 패트릭 대성당과 할렘에 사는 가난한 흑인 아이들 사이에서 모순을 일으켰으며, 할렘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는 영적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는 아무런 유보도 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것이다. 

 

머튼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먼저 에띠엔느 질송과 올더스 헉슬리였다. 질송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하고, 헉슬리를 통해 신비주의와 접했다. 그후 머튼은 사람이 들짐승과 구별되는 삶을 살려면 기도와 금욕주의를 통해 영혼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헉슬리의 생각에 공감했다.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해 '영혼의 어둔 밤'을 인식하고,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를 통해 일상 속에서도 성인됨과 관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를 기도로 이끈 것은 로욜라 이냐시오였다. 그는 혼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해보앗는데, 꼬박 한 달동안 어두운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성경을 읽고 묵상했다. "과연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무엇일까"하고 말이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정해 매일 아침 동이 틀 무렵에 일어나 미사와 영성체를 하고, 시과경을 낭송하고, 아침마다 45분 정도 묵상하고 영적 독서를 했다고 한다. 훈련된 삶의 방식이 그를 더 개방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를 여유롭고 화를 덜 내며 불평 없고 지치지 않게 해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헨리 나웬은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수용적이다. 그들은 붙잡기보다 어루만지고, 깨물기보다 입을 맞추고, 시험하기보다 경탄한다. 기도에 맛들인 사람들에게 자연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길이 된다.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지평을 넌지시 보여주는 베일이 된다"고 했다.

 

 

   

▲ 켄터키의 트라피스트 수도원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

 

그밖에 머튼은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였던 마크 반 도렌의 영문학 강의와 다니엘 윌쉬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가톨릭교회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인도의 수도승이었던 브라마차리가 마련해 주었다. 브라마차리는 머튼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이 쓴 아름다운 신비주의 저서들이 참 많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두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머튼의 아시아 종교에 대한 호기심을 상대화시키고, 오히려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이 얼마나 풍성한지 보여주려고 했다. 먼저 제 것을 알아야 한다는 암시였다. 

 

대학시절 <제스터> 편집위원으로 있던  랙스는 토마스 머튼에게 직접적이며 영향을 준 유대인 친구였다. 훗날 머튼 "타고난 관상가요 예언자였다"고 말한 로버트 랙스는 뉴욕6번가를 산책하다가 느닷없이 "자넨 대체 뭐가 되고 싶은가"하고 물었다. 머튼이 "그저 좋은 가톨릭신자가 되고 싶다고 해두지"라고 답하자, 랙스는 "그럼 성인이 되고 싶다는 거지?"라고 되물었다. "내게 어떻게 성인 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발뺌을 하자 랙스가 멋진 대답을 날렸다. "바람으로써...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지. 자네가 동의만 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뜻대로 자네를 빚어주실 것이라 믿지 않나? 자네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원하는 것뿐이야."

 

머튼은 나중에 이 사건을 두고,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은 그리스도인이었고, 하느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썼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랙스는 가톨릭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받은 모든 것을 감사했지만 그들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다. 서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다 보면 서로 해를 끼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이정표로 보았다. 

 

그가 결정적으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9년에 머튼은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물었다. "나는 어떻게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파괴의 강렬한 힘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발적인 자기절멸(絶滅)뿐이라고 자각했다. 더 많은 땅과 자원을 정복하려는 세상의 열망을 보면서, 머튼은 이를 모든 소유에서 자발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라는, 벌거벗은 채 살아가라는 초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가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일기에 썼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적응하면서, 자발적인 가난이 폭력을 막을 뿐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금 위험의 한복판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수도원이 상징하는 초연함은 책임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심없이 두려움 없이 악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도록 해주는 최고의 행위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비폭력의 한복판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비운 사람만이 진정한 혁명가'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 생명조차 자기 소유라 주장하지 않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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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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