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서적♣/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스크랩] Re:제2장 -04 <신자들의 영성 생활-②>★영 성

소눈망울 2017. 1. 22. 20:22


김보록(살레시오수도회 수련장․신부․영성신학)



3. 일반 신자의 영성 생활을 위한 구체적 방법

 

 

위에 서술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올바르고 보람찬 영성 생활을 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 방법을 몇 가지 조목별로 나열해 보겠다.

 

 

1) 사물의 감각적 외관을 꿰뚫어 그 참모습을 본다.

 

먼저 필요한 것은 신앙의 눈으로 사물의 감각적, 현세적 외관을 꿰뚫어

모든 사물을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평가하고,

그분을 섬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감각적 외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 안에 진실이 아닌 허위를 억지로 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감각적으로는 사물의 외관을 보고 받아들이면서

사물을 평가하고 취급하는 자기 마음과 자세를 바꾸어 

신앙과 사랑과 영으로 채우는 것이다.

 

사물의 진실은 감각적 현실적 외관뿐만 아니라,

훨씬 그 이상으로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의 사랑과 자기 양도(증여)를 표현하며 

또한 그분을 찬양하고 섬기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물의 ‘참모습’을 보는 ‘영적 시각’이 필요하고,

그렇게 평가하는 ‘신앙적 가치관’이 요구되며,

또한 사물을 그 ‘진상’대로 사용하는 ‘초자연적 자세’가 요망된다.

 

“공중의 저 새들을 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거나 하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십니다.

……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시오. 

……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십니다.”(마태 6, 26-30).

 


예수의 눈에는, 

모든 사물이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덕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이 ‘영적 시각’과 ‘신앙적 가치관’과 ‘초자연적 자세’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각과 물질과 현세적 일에 기울어져 있으므로, 

꾸준한 노력으로 정신과 내성과 신앙에로 들어 올려야 한다.

 

항상 사물 안에서 영성을 찾아  

감각을 사용하면서도 내성으로 돌아가고, 물질을 영적 자세로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결국, 

사물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계기로 삼느냐, 죄 짓는 계기로 삼느냐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고 

사물의 참모습을 보느냐, 감각적 외관만을 보느냐는 우리의 내적 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사건 안에 하느님의 섭리를 본다

 

사물뿐만 아니라, 세상의 움직임과 사건들 안에서도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보아야 한다.

 

세상은 감각적, 인간적 차원으로는 

과학, 정치, 경제 등 인간의 힘과 자유 의지로 인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실은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힘과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하시고 이용하시면서

인간 사회와 세상을 당신이 계획하신 완성에로 확실히 인도하시는 것이다.

 

더 놀랍도록 위대하신 것은 

인간의 죄와 세상의 여러 형태의 악에서까지 보다 큰 선을 끌어내시어,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완성에 기여하게 하시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은 

세상의 움직임과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생활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고 운영하신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절대성의 신비와 참 위대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과 죄악까지 이용하시어

그것을 세상의 완성과 인간의 구원이랑, 당신의 계획의 완성에 기여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각적으로 볼 수 없고,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으며, 

오직 신앙의 눈과 마음으로만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비적이고 절대적이고 또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인간적 사고로서는 사랑과 반대가 된다고 생각되는

‘고통, 아픔, 고생, 희생’ 등의 사실 안에서 드러나고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하느님의 사랑도 역시 그분의 섭리와 절대성같이

신앙으로 보는 눈을 가지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고통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사랑하시고 속죄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고통을 받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진실은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 안에 체험한 사람만이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다.

지난 2000년간 얼마나 많은 성인 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이진실을 깨닫고 체험했을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의 절대성도 신앙의 마음으로 확고히 믿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나를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사는 사람이어야만 견고하고 보람차고 복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

 

사물은 하느님의 현존과 생명과 사랑과 힘으로 가득차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사물이 존재하고, 생물이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의미와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늘 사물로 둘러싸여 사는 우리도 

사물과 함께 사물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분을 찬양하고자 한다.

 


물고기가 바닷물 속에서 물을 마셔야 살고 물 밖으로 뛰쳐 나가면 당장 죽듯이,

우리도 하느님이란 커다란 바닷물 속에서 하느님을 들이마시는 덕분에 산다.

 

이 바닷물에서 뛰쳐 나간다면 그 순간에 숨이 막혀 죽고 만다.

하느님은 나의 앞에, 뒤에, 옆에, 위에, 밑에 현존하시고,

나의 몸과 마음속 깊숙히 스며 침투하시고, 나를 전적으로 장악하신다.

나는 하느님으로 온전히 둘러싸여 살아있고 하느님 안에 존재하며

하느님을 숨쉬면서 생활한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 28).

 


하느님만큼 우리에게 가까우신 분은 없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가까우시다.

따라서 하느님만큼 친교하기 쉬운 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과 뜻만 가지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하면서도

즉시 친교할 수 있고 얼마든지 친밀하게 일치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수련하는 가운데 점차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물 안에서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사실을 늘 보는 ‘영적 시각’을 가지고

사물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실을 실감하는 ‘영적 감각’을 지녀야 한다.

 

또한 사물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신앙적 자세’를 길러야 한다.

자기는 하느님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침투되어, 하느님을 숨쉬면서 산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하고 자각하고 그 의식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마리아처럼-거룩한 내맡김
글쓴이 : 무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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