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서적♣/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스크랩] 하느님섭리에내맡김《서론》⑴ p.13-15

소눈망울 2016. 11. 11. 21:07

ㅣ서론 ㅣ



⑴ p.13-15


   16, 17세기에 프랑스에는 많은 영성 저술가들이 있었다.

이 두 세기의 역사 안에는 위대한 이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바로 그들은 유럽 문명을 활성화시키는 데 있어 일익을 담당했던 자들이다.


이 위대한 이름들 중에 전에는 공적으로 아무런 영예를 누려보지도 못하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한 때 별처럼 빛나던 사람에게 가졌던 애착심보다 훨씬 더한 애정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한 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코사드의 요한 베 (Jean-Pierre de Caussade)이다.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라곤 거의 없어  그저 막연해 할 뿐이다.

그의 초상화는 한 점도 없으며 

키가 큰지, 작은지  혹은 뚱뚱한지, 말랐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머리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리고 눈은 푸른색이었을까. 아니면 갈색이었을까?

멋졌을까, 초라했을까?

나는 초라했으리라 상상해 보지만  

그러한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행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들이다.    (p.13)



   는 1675년 3월 6일에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랑스 남쪽의 켈시 지방의 어느 곳이었으리라 추측이 되고,

거의 확실시되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을  당시 대학이 있던 도시인 

툴루즈(Toulouse) 북쪽에 위치한 카오르(Cahors) 읍에서 보냈다는 사실로,

20년 전 페넬롱(Fenelon)도 그곳에서 학생으로 지냈던 곳이라는 점이다.


코사드는 1693년 툴루즈에서  예수회의 수련자가 되었으며,

170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다음 종신서원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문 적이 없었다.


그는 오크 오리악에서 희랍어, 라틴어를 가르쳤고  로데에서는 철학 교수를 지냈으며,

그 후 모리악과 아빌에서 같은 자리를 굳혔다.

이 모든 도시들은  툴루즈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코사드가 신학 공부를 하고 또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대학은 

툴루즈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후 1720년까지 코사드는 여러 도시에서 교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그 해를 끝으로 교수직을 접고, 

프랑스남부와 중부 지방의 여러 곳에서 설교사와 고백 신부로 일하였다. 


1729년 그는 프랑스 북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로렌느 공작가의 엣 수도였던 

'낭시(Nancy)' 란 시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영성사(靈性史)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에 있는 수도원, 

즉 (방문회 수녀들)(Visitation nuns)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 결과들을 뒤에 가서 살펴볼 것이다.

그는 꼭 일년 동안 그곳에 머문 다음 툴루즈에 돌아와 알비로 갔다.


1733년 말낭시에 돌아온 그는 거의 6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 다음  페르피냥에 있는 예수회 대학과 알비에 있는 대학의 학장으로 일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중 마지막 5년을 

툴루즈에 있는 예수회 신학원 학생들의 책임자로 지내다가 

1751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또났다.   (p.15)





Fran?ois de Salignac de la Mothe-F?nelon, 은 보통 프랑스와 페넬롱으로 알려져 있는데 

프랑스의 로마카톨릭 신부로서 주교, 신학자, 시인 그리고 작가였다. 

그는 정적주의(Quietism)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주로 기억되고 있다. 

1699년에 텔레마쿠스의 모험이라는 작품을 내었다. 


출처 : 마리아처럼-거룩한 내맡김
글쓴이 : 무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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